“와인을 사두면 값이 몇 배로 오른다는데, 투자해도 될까요?”
“우리집에 좋은 와인이 있는데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와인이 좋은 투자 아이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이처럼 순진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신문에도 이런 기사가 종종 나와서 돈 좀 쉽게 벌어보려는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하는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가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와인에 투자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길동이는 투자용 와인은 보르도 그랑 크루가 좋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한 병에 500달러짜리 와인을 한 케이스(12병, 6,000달러) 샀다. 길동이는 또 주위에서 시키는 대로 온도(화씨 55도)와 습도(70%)가 유지되는 와인 셀라를 구입하고 와인들을 잘 모셔두었다. 그리고 10년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팔려고 내놓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생각보다 얼마 오르지 않은 것이다. 알고 보니 그가 산 와인의 빈티지가 좋지 않아서 콜렉터들이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전에 그가 한 케이스를 주문했을 때 쉽게 구한 것도 사실은 콜렉터들이 많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곤란한 것은 아무도 길동이의 와인을 사려하지 않는 것이다. 10년동안 와인이 얼마나 잘 보관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길동이의 10년은 덧없이 흘러갔을 뿐 아니라 만일 한병도 팔지 못한다면 오히려 6,000달러를 손해 볼 수도 있게 생겼다. 길동이의 와인 투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와인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시장 동향은 물론이고 적어도 빈티지의 차이 정도는 기본이다. 보르도의 경우 좋은 빈티지와 나쁜 빈티지의 가격차는 엄청나서 샤토 라피트 로쉴드의 경우 1999년산은 처음 출시됐을 때 150달러였으나 2000년산은 700달러에 나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으로 평균가격을 비교해보면 99년산이 650달러, 2000년산은 2,200달러에 달한다. 어떤 투자가 현명한 것인가?
둘째, 보관 상태의 완벽성이 증명돼야 한다. 전문적인 와인콜렉터라면 셀라가 천재지변이나 화재, 혹은 한여름에 정전되는 등의 비상사태에도 가동되는 백업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을 만큼 이 문제는 중요하다.
몇 년전 일부 고급 와인들이 시세의 반값 이하로 시장에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잘 아는 소믈리에가 조심하라고 일러주지 않았으면 당장에라도 몇병 사고 싶을 만큼 유혹적인 가격이었다. 이것은 카트리나 재해 때 뉴올리언스의 식당들에서 흘러나온 뒷거래 와인들이라고 했다. 찌는 듯한 날씨에 그 지역이 며칠이나 정전됐었으니 와인이 어떻게 됐겠는가.
셋째, 비슷한 이야긴데 유통과정이 확실해야 한다. 와인은 출시된 후 누구한테 팔렸으며 어디서 보관했느냐가 상태를 판단하는 아주 중요한 척도가 된다. 최고로 치는 것은 와인을 만든 와이너리 혹은 샤토에서 직접 내놓은 ‘처녀와인’이다. 경매소들은 판매경로가 확실한 것들만을 취급하고 있으며, 요즘은 짝퉁 와인도 많이 나돌기 때문에 와인병을 감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백 수천 수만 혹은 수십만 달러짜리 와인을 사고파는 입장에서는 100% 확실한 것을 매매하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살 때도 팔 때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믿을만한
판매상을 거치지 않으면 와인 투자의 의미는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러니까 길동이가 자기 집에 갖고 있던 와인을 들고 나왔을 때 그걸 제값 내고 사는 사람은 없다는 얘기다.
나도 개인 셀라에 넣어둔 와인들의 가격을 현시세로 계산해보면 처음 샀을 때보다 상당히 많이 오른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들을 팔겠다고 나선다면? 아마 백방으로 뛰어보아야 한 병도 팔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와인 투자란 ‘와인을 비싸게 만들어 마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100달러 주고 샀으나 10년쯤 후 500달러가 돼있는 와인을 마시는 것, 그 오랜 기대와 기다림, 와인과 함께 무르익은 성숙한 미감을 즐기는 것, 그것이 와인애호가의 진정한 ‘투자’라고 본다.
정숙희 / 특집 1부장·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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