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한 듯 세종시 수정안에 강한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요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은 ‘신뢰’이다. 국민에 대한 신뢰를 이유로 세종시 원안을 고집하는 박 전 대표는 며칠 전 지지 의원들에게 자신의 집을 공개한 자리에서 한 경제학 교수의 말을 인용해 “신뢰를 돈으로 환산하면 300조원이나 된다”는 발언을 했다. 이 같은 산정액이 어디에 근거한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신뢰가 경제적으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닌 덕목이라는 뜻을 강조하려 했던 것 같다.
신뢰는 사회를 지탱시키며 성장시키는 토대가 된다.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는 서로간의 불신 때문에 거래 행위에 있어 많은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반대로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이런 비용이 적게 든다.
신뢰의 경제학을 연구해 온 일부 학자들은 이런 논리를 들어 미국과 소말리아의 엄청난 소득 격차를 신뢰의 격차로 설명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미국 국민소득의 0.5%만이 땀 흘린 결과이고 나머지 99.5%는 신뢰의 결과라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신뢰가 사라지면 비용은 올라가게 되고 속도는 느려진다는 지적은 옳다.
작금의 경제 위기도 신뢰의 위기로 설명할 수 있다.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신뢰의 추락이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돈의 흐름이 원활치 못하고 경기가 기대만큼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금융기관들 간의, 또 금융기관과 소비자 간의 신뢰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뢰가 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인지를 규명한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한국을 중국, 이탈리아 등과 함께 신뢰 수준이 낮은 국가의 하나로 꼽았다. 일본계인 후쿠야마는 평소 일본의 식민강점이 한국의 산업화를 도왔다는 견해를 피력해 온 우파 논객. 그래서 한국을 낮은 신뢰 국가로 분류한 그의 의도를 한국 폄하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각종 조사에서 나타나는 한국 사람들의 신뢰도 조사 결과를 보면 후쿠야마의 지적을 비판만 하기는 힘들다.
최근 나온 ‘한국의 사회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는 28.2%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4명에 1명꼴로 “그렇다”고 답했다. 60%를 훌쩍 넘는 스웨덴, 핀란드는 물론 39%인 미국, 일본보다 상당히 낮았다. 특히 정부에 대해서는 신뢰도가 18%에 불과, 불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후쿠야먀의 지적에 별 할 말이 없을 밖에.
이번 주 세종시 수정안이 입법 예고됨으로써 이제 몇 달간 대한민국은 세종시 전쟁에 휩싸이게 됐다. 사실 세종시 논란에 수많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양측이 내놓는 주장과 청사진에는 사실과 포장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여론전에 휩쓸리거나 어정쩡해 하고 있을 뿐이다.
어줍지 않은 식견으로 세종시 수정안과 원안이 가져 올 경제적 효과와 정치적 효율성을 비교해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몇 달 간의 공방이 끝나면 ‘불신 코리아’의 벽이 지금보다 더 높아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추후에 치러야 할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땅에서 조정과 타협이라는 정치의 합리적 기능이 상실된 지는 오래다. 어떤 형태로든 승패는 가려지겠지만 모두가 패자가 되는 최악의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 꺼진 불을 헤집어 다시 불씨를 살려내고 기름을 부었다. 역사의 평가 운운하지만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아는 일.
어쨌든 그가 말을 바꾸면서 들고 나온 수정안이 설사 경제적으로 더 효과적이라 하더라도 소모적 논쟁에 불을 지핌으로써 가뜩이나 취약한 대한민국의 신뢰망은 더 큰 손상을 입게 됐다. 정부에 대한 불신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민과 국민들 사이의 불신이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대가’까지 내다볼 줄 아는 것, 이것이 지도자의 혜안이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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