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옆면에는 빗금이 그어져 있다. 빗금이 그어진 유래는 이렇다. 수백 년 전 금과 은으로 만든 화폐가 유통되던 시절 사람들은 동전의 옆면을 미세하게 깎는 방법으로 금과 은을 빼돌렸다.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동전 옆면에다 빗금을 그었다.
그러나 금화와 은화가 더 이상 화폐로 사용되지 않는 지금도 동전 옆면에는 빗금이 그어져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오랫동안 동전에는 그냥 빗금을 그어왔기 때문이다. 빗금을 그을 필요가 사라졌는데도 빗금 긋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인간은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한번 어떤 길에 들어섰다 하면 그 길이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 길을 좀체 벗어나지 못한다. 새로운 길을 가야 하는 두려움보다는 지금 가는 길이 안겨주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제도가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돼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른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 불리는 현상유지 성향이다.
미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지 못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선진국의 하나이다. 세계 최강대국임을 자처하는 미국으로서는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의료보험 체계가 ‘고비용 저효율’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락한 것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미국사회를 지배해 온 뿌리 깊은 경로 의존성을 원인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과감하게 전 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새로운 경로를 선택했지만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쭉 그래왔으니까”라는 뿌리 깊은 의식 때문에 의료개혁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져 오지 못했다. 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현상 유지론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조차 않았다.
그러다 의료비용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고 무보험자로 전락하는 미국인들이 급증하는 등 더 이상 방치하기 힘든 위기상황이 닥치자 그때서야 전면적인 의료개혁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에 박차를 가한 것은 물론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 교수는 “의료제도가 미국인들을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로 나누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사이더는 좋은 보험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용에 상관없이 최신 의학의 성과를 마음껏 누리는 반면 외부인은 빈약한 보험에 가입하거나 아예 보험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말한다. 인사이더들의 치솟는 의료비용 때문에 더 많은 미국인들이 아웃사이더로 내몰리는 역설적이면서 슬픈 현상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길고도 치열한 논의를 통해 마련된 연방 상·하원의 의료개혁안이 현재 조정 과정을 기다리고 있다. 보수진영은 개혁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고 진보진영은 또 그들대로 양원안의 내용에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조정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인 ‘퍼블릭 옵션’이 배제될 가능성이 높아 “무늬만 개혁”이라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양원 조정을 거쳐 몇 주 후 오바마 책상 위에 놓여질 개혁안은 완벽함과는 분명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첫걸음을 뗀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양원 통과를 위해 너무 많은 핵심 내용을 양보하는 바람에 ‘누더기 법안’이 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의 정치적 환경에서 조지오 알마니 같은 명품 플랜을 주문하는 것은 이상론일 뿐이다.
무보험이라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알몸으로 선 채 찬바람을 맞고 있는 미국인이 수천만에 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에게 군데군데 헤지고 기운 옷이라도 하루속히 입혀줘야 할 책무가 정부에 있다. 일단 입혀 놓고 좀 더 나은 것으로 조금씩 수선해 가면 되는 일이다.
만약 이번 개혁안이 무위로 끝난다면 의료개혁은 한동안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심리적 허탈감 때문에 동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고, ‘분배’니 ‘복지’니 하는 말에 앨러지 반응을 보이는 세력이 다시 집권이라도 하게 되면 개혁은 한참 물 건너가게 된다. 사실상 이번이 개혁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 보면 된다.
조윤성 /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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