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선진 문물을 전수한 왕인 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사카에 있다. 1938년 오사카 부에 의해 사적지로 지정된 이곳에는 5년전 ‘백제문’이라는 기념물도 건립됐다. 오사카에는 이밖에도 왕인 박사를 모시는 사당도 있고 백제 역부터 백제 교, 백제 중학교 등 백제를 기념하는 건물들이 곳곳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자로는 ‘百濟’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구다라’라고 읽는다는 점이다. 지금도 충남 부여에 가면 금강에 ‘구다라’라는 나루터가 있다.
옛날 이곳을 떠난 배가 일본을 드나들며 선진 문명을 전했고 이 나루터 이름이 ‘백제’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구다라’는 ‘큰 나라’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일본 천황은 ‘구다라 대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본 천황의 조상이 백제 유민이라는 것은 이제 거의 정설로 굳어져 있다.
한 때는 찬란했던 백제였지만 7세기 신라에 의해 망한 이후에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연히 찬밥이었고 고려 때도 왕건이 호남 사람을 쓰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면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고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공교롭게 한국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군부 세력이 모두 영남권이어서 구 백제권은 톡톡히 소외되었다. 이 지역이 그나마 관심을 좀 받게 된 것은 1997년 선거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다. 김 대통령은 임기 중 자신의 고향이 가까운 목포에서 서울까지의 서해안 고속도로를 완공함으로써 이 지역 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전라도 출신 대통령이 나오면서 호남에 대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같은 백제권이었던 충청 지역의 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종필이 충청권의 맹주로 수십년간 권력 주변에 있었지만 정작 충청도를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백제의 고도 부여는 일본에서는 추모의 대상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최근까지 가장 발전이 되지 않은 지역의 하나였다.
충청권의 소외된 민심을 가장 잘 파악한 인물이 노무현 전대통령이었다. 그는 2002년 후보로 나오면서 충청도에 행정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시 선거에서 여야가 호남과 영남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충청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다. 누구도 감히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했다. 노무현의 아슬아슬한 당선은 충청권의 몰표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 후 행정 수도 이전은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임은 관습 헌법”이라는 헌법재판소 판결로 무위로 그쳤으나 행정부처 일부 이전 안이 국회에 올라와 충청권 표를 위식한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그러나 작년 말 이명박 대통령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행정부 분할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선언을 하면서 세종시를 행정도시에서 교육 과학 도시로 새롭게 바꾸는 수정안이 11일 나오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이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정치권이 온통 난리다. 충청권 주민과 야권은 원안을 지키겠다며 아우성이고 여권 내에서도 친박계는 원안 사수를 고집하고 있다. 국토의 균형 발전도 좋지만 행정 부처를 나눠 이를 꾀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에 따른 낭비와 비효율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행정부를 나누는 것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면 충청도에만 줄 것이 아니라 강원도와 제주도, 호남과 영남에도 골고루 나눠야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다. 황당한 구상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충청권 행정도시를 제안한 것이나 박근혜가 원안 고수를 외치는 것이나 진짜 이유는 하나뿐이다. 대선에서 충청권 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이명박 정부의 수정안은 원안보다 시 규모도 4배나 커졌고 건립시기도 앞당겨졌다. 행정도시보다 교육 과학 도시로 키우는 게 장기적 관점에서 나을 수도 있다. 세종시를 둘러싼 논란이 격화하면 할수록 여권의 분열을 노리는 야당한테는 좋겠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국력의 낭비는 심해진다. 충청도민과 정치권이 이 문제를 어떻게 순조롭게 마무리하느냐가 한국 정치가 선진국을 향해 가느냐마느냐를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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