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렸다. 늦가을이 떠난 자리, 꽃이 피었다가 진 자리, 추억처럼 남겨 있던 꽃대궁, 혹은 나뭇가지에 별책부록같이 다시 피워 놓는 눈꽃의 여지없는 아름다움… 한밤내 내린 눈은 길을 묻고 뜰을 묻고 천지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덮어버릴듯이 퍼부었다. 연말 끝에 남아있는 주말비즈니스를 걱정하며 서성이는 내 마음까지도 간단없이 덮어버렸다.
추억은 늘 삐죽, 예고없이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무명치마에 한기를 묻힌 채 마실오시던 할머니의 오랜 친구처럼 기척없이 그렇게 찾아오곤 한다. 폭설에 감금당한 밤, 살아온 날들의 겨울추억이 또 그렇게 삐죽, 내 마음을 열고 들어왔다.
어릴적 오목하던 초가에 눈이 내리면 창호문 너머의 밤은 달밤처럼 환했다. 그런 밤이면 마당을 덮은 눈이 토방으로 올라오는 소리, 식구들의 신발 속으로 숨어 들어오는 소리가 베개 밑으로 들려왔다. 대숲에 걸려 있던 눈덩이가 한꺼번에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나무 가지가 가까운 산에서 타악,하고 꺾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새벽 동이 트기 전의 제일 추운 시간, 식어진 아랫목에서 내 남은 잠은 옹송거리고 군불 때는 아궁이 속으로 깊숙이 던져지던 마른 솔가지에서도 타악타악, 같은 소리가 났다. 오롯하게 올라오던 온돌의 온기에 몸 담그고 다시 아득한 잠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아련하게 듣던 넉가래와 싸리비가 눈을 쓸어내던 소리… 겨울은 추었지만 추웠던 겨울은 따뜻한 소리의 기억만을 남기고 있다.
도화지 오려 스무색깔 왕자파스로 예배당의 뾰족탑을 그리고 그 뾰족탑 위에 노랑색 별 하나 그려넣어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던 유년의 겨울은 카드 속의 풍경처럼 단조로웠다. 그 나무십자가 걸려 있던 예배당에 성탄절이 찾아오면 아이들은 줄서서 달콤한 팥이 켜켜이 묻어 있는 시루떡을 받아왔다. 그 시절 예수님은 시루떡이었다. 노란 별을 타고 겨울에 한번씩 찾아오는 따뜻한 시루떡이었다.
여름밤에 플라타나스 무성한 그림자를 밟고 앞서 가던 남학생, 그 빼곡하던 플라타너스 잎사귀의 자리에 흰눈이 내려앉던 겨울이 되도록 마주쳐 보지 못한 그 뒷모습이 나의 첫사랑이었음을 감지한 것도 겨울이었다. 나만을 생각하던 한평짜리 마음자리에 타인을 들여 놓고 비좁아 잠들지 못하던 처음사람, 첫사랑은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일깨워주고 내 마음자리에서 떠나갔다. 첫눈처럼 왔다 간 첫사랑은 어설퍼서 아름다웠다. 언제나 짧은 건 슬프고 또 슬픈 건 아름다운 법이 아닌가.
도회지에서 만난 겨울은 황량했다. 저문 겨울날 하늘까지 올라가 있던 아파트의 창문들이 퍼즐처럼 탁,탁,탁, 불을 밝히는 그 도시의 끝을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외로웠다. 쿨럭쿨럭 바람에 통째로 흔들리는 포장마차를 지나 아스피린을 팔던 작은 약국 모퉁이를 돌아 연탄재가 함부로 쌓여 있는 그 좁은 골목의 제일 끝에 붙어 있는 자취집은 언제나 아랫목에 애매한 온기를 내밀며 나의 기척을 기다리곤 했다. 화라락 번개탄에 붙은 성냥불이 아랫목의 확실한 온기가 될 때까지 서성이고 서있으면 성북행 전철이 달그락거리며 귓전을 밟고 지나갔다.
밤 늦어 돌아온 남동생을 위해 라면을 끓이는 밤, 연탄 위 불먹은 삼발이는 달궈진 별이 되어 싸르르륵 양은냄비를 끓이고 얇은 벽 너머 가난한 부부의 싸움은 그날 밤도 계속되었다. 모든 게 불확실하던 시대, 두봉지 라면에 찬밥까지 말아먹어야 채워지던 동생의 허기처럼 우리의 젊음은 허기로 가득했다. 알전구 밑에서 수백개 인체의 뼈이름을 주술처럼 외우던 동생, 그 주술의 힘으로 동생의 미래만은 확실해지길 바라며 돌아눕던 그날 밤도 밤바람소리가 우리들의 두평짜리 좁은 쪽창을 흔들어댔다.
첫아이의 달콤한 하품과 팔 올린 나비잠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천번은 넘어지며 떼어 놓던 그 아이의 첫걸음을 지켜보던 겨울의 기억이 가슴 속에 아직 말랑하다. 오리길을 걸어온 광주리 속의 떡가래처럼 아직 말랑하고 보드랍다. 아이에게 눈, 누-운, 눈사람, 눈,사,람, 이라고 가르쳐주면 오디같이 까만 아이의 눈은 내 입을 바라보고 나는 아이의 작은 입이 오물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행복했다. 행복은 품는 것이 아니고 바라보는 것이라 깨달으며 뒤뚱거리는 아이의 걸음을 쫓아다니던 그해 겨울,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겨울나기를 했다.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노래가 된 목월시인의 이별의 노래가 떠오르는 밤이다. 빈 하늘로 새들이 날아가기 시작할 때부터 생각나는 그 노래는 부를 때마다 마음도 눈도 그렁그렁하게 한다. 미혹을 전제로 한 낱말일지도 모르는 불혹이라는 나이에 목월시인이 일으켰던 일탈의 사랑이 그 시의 모티브였다는 불편한 진실….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윤리를 비켜섰던 그의 사랑은 끝이 났고 노시인도 우리의 곁을 떠난지 오래이다. 다만 그의 시만이 그렁그렁한 노래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창밖은 계속 눈이 내리고 전나무에 켜둔 작은 크리스마스등들이 홈빡, 눈속에 갇혀 있는 모습이 참 예쁘다. 넘어짐은 일어섬을 전제로 하고 일어섬은 넘어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 지난 한해가 감사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경기 역시 딛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 주리라. 하나 둘 셋 넷, 저 전나무의 작은 등불처럼 내 마음에도 감사의 등들을 걸어보면 어떨까. 날 저물어 나란히 돌아와 있는 식구들의 신발들 그 이유에 하나, 먼나라의 폭설소식에 전화를 걸어온 노부모의 목소리, 아직은 명료하게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에 또 하나, 내일 하오가 되면 폭설이 우리의 감금을 풀어줄 것이라는 소식에 또 하나…….행복은 언제나 하찮은 것들이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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