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저만치 7:3 각도로 ‘비너스’를 노려보며 4B 연필을 켄트지에 열심히 비벼대면서 진땀을 흘리던 그 때 일을 가끔 꿈에서 보곤 했었다.
1945년 7월 여름방학이 되어 고향집에 내려갔다가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군이 쳐들어오게 되니 공산주의 과격분자들은 “아무 집이나 들어가 살면 제 집이 된다”고 선동을 하여 우리는 내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돼버렸다. 어쩔 수 없이 옮긴 단칸방에서 옆방에 사는 이가 서울 방송을 듣고 “이화대학에 미술과가 생겼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이거다. 꼭 화가가 된다는 것보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고생고생하며 혼자 죽음의 38선을 넘어왔다.
학교에 와보니 학적이 그대로 있었으므로 재학생 특혜로 전과가 허락되어 미술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입학원서를 들고 ‘미술과 과장실’이란 문패가 붙은 방에 들어서게 되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고 내려다보시는 심형구 과장의 첫 인상은 매우 엄격한 분으로 느껴졌었다. “지금이 10월 말인데 이렇게 늦게 오면 어쩌느냐?”고 나무라시는 것 같아 겁이 덜컥 났으나 이제 와서 어쩌랴 저 죽음의 임진강을 다시 건널 수는 없는 일이기에…
맨손으로 나타난 나의 처지를 묻지도 않고 과장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켄트지 1장과 4B 연필 한 자루 그리고 고무지우개를 주시며 실기실에 가서 그리기 시작하라고 하셨다.
뎃상실을 찾아간 나는 뒷자리에 세워진 이젤에 다가가 석고상을 쳐다보았다. 비너스였다. 정면 칠판 옆에 몇 장의 그림이 붙어 있는데 송기, 배상숙, 정귀순이란 이름들이 눈에 띄었다. 저 친구들은 실력들이 저렇게 좋은데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 자리에 빳빳히 선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계 있는 미술지도를 받아본 일도 없었고 혼자 밤이면 밤마다 훤해질 때까지 노트에다 연필로 쓱삭쓱삭 선을 그리면서 장난을 치던 수준의 자신이 아니었던가.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렇게 맨손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1945년 10월28일에. 저쪽에서 보고 있던 학생이 다가오더니 화판을 가져다 씩 웃으며 내 손의 켄트지를 빼앗아 핀으로 붙여주고 이젤에 세워놓고 간다. 그 친절이 고마웠다. 이재순이었다.
다음날부터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으니 내 나름대로 석고상과 비슷하게 보이도록 칠을 해놓으면 과장님은 굵직한 선으로 좍좍 그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는 “잘 보고 그려. 빨리 그린다고 좋은 게 아니야. 다 지워버리고 다시 그리는 게 좋겠어” 아이고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데… 이렇게 시커멓게 만들어주면 어쩐다지? 그래도 나는 묵묵히 다 지워버리고 다시 열심히 칠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 작업을 허구한 날 칠하고 지우고 다시 칠을 하고 또 지우고를 반복하는 동안 2년이 지나고 우리는 3학년이 되어 유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석고 뎃상은 비너스와 아폴로 두 장을 간신히 떼었는데 잘 됐다거나 그만 하란 말씀은 못 들어봤는데 유화를 시작하여 인물화를 그리게 되니 훨씬 일하기가 쉽게 느껴지고 재미가 있었다.
물감 담는 통이 없어 과장님이 학창시절에 쓰시던 목재로 된 ‘에노구박스’를 주셔서 감사하며 잘 메고 다녔었다. 그리고 때로는 물감 통을 보시고 빠진 색깔을 보충해 주시곤 하여 어찌나 고마웠던지. 심과장은 무뚝뚝하고 무섭고 어려운 분으로만 여겨졌었는데 미군 대령에게 다리를 놓아 카드도 그리게 하고 편지지에 컷을 그리는 일도 맡아주셔서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의 도움을 받기도 했었다. 하루 저녁 앉아서 쓱싹쓱싹 그려서 보내면 적지 않은 돈이 왔다. 아마 38선을 넘어온 고학생이라는 과장님의 설명 덕이었을 것이다.
심과장이 동경 우에노 미술학교에 다닐 때 고학을 하며 5전짜리 우동 한 그릇 사먹고는 하루 종일 물만 마시며 견디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나보고 힘들겠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용케도 4년을 버티고 졸업을 했지만 비너스를 쳐다보며 켄트지에 4B 연필을 비벼대며 지웠다 칠했다 그 고생을 하게 만든 분이 나의 어떤 면을 보시고 중도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평생 화가라는 딱지를 달고 살면서도 마음에 드는 내 작품 한 점 못 가진 나는 외롭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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