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붕역풍비(大鵬逆風飛), 생어역수영(生魚逆水泳)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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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00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 징기즈칸 -
세계의 절반을 점령했고 세계최초로 동서 통합을 시도했고 마침내 그것을 이루었던 징기스칸의 출신배경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아니었다. 지극히 불우했다면 불우했던 그가 만난을 극복하고 그의 부족을 일치시켰다. 그리고 민족의 대통합을 이루었고 마침내는 중원벌을 점령했다. 그리고 드디어 세계를 그의 발아래 두었다. 그래서 그를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한다. 동이족 후예인 대한의 남아들아, 동이족 후손인 징기스칸을 공부하라.
한편 몽골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여성이 있는데 바로 1339년 원제국(元帝國)의 황후가 된 고려의 기씨(奇氏) 소녀이다. 원래는 공녀(貢女)이었지만 후에 중국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가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하지만 기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으니 마침 원 황실 깊숙한 곳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高龍普)다. 그는 나름대로의 실권을 장악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기씨 소녀같은 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그녀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최측근에서 모시며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원사(元史) 후비열전’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의 혼을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으니 그는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었는데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권력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1년 5개월을 유배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하는데 원(元)제국의 차기 대권을 노리던 막강한 후보자 그룹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그만큼 기씨녀는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영특한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으니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는데 마침 타나시리의 친정식구들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그후 황후가 되려고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다. 그러나 원 제국의 또 다른 실력자 승상 빠앤이 적극 반대했다.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권자였다.
고려의 공녀 출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야심은 원나라의 정치역학과 지배구조상 분명 무리였다. 왜냐하면 태조 징기스칸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앤후드까지 축출하기로 작정하였는데 마침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드디어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후드를 축출하는데 성공했고.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 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당시 궁궐에 포진하고 있었던 고려 출신들의 협력과 그녀의 철저한 지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처신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1 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 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
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끌어들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여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이자 그녀의 고향 사람으로서 한 때 뜨거운 사이였던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 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사’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했다”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군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는데 그는 무능하고 태만했지만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런데 이것이 기황후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결국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골초원으로 쫓겨 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 졌고 몇 줄 역사의 기록이 그녀의 여장부됨과 호방함을 기록해 놓았다. 한편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은 누이동생이 원나라 황후가 되면서 교만해지고 포학해져 세도를 부리다가 배원(排元)정책을 쓴 공민왕에 주살(誅殺)당하였다. 황후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공민왕을 폐쇄하고 원나라에 들어와 있는 왕씨 종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으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자 이 일에 대해서 당시 원나라에 가 있었던 문익점 (文益漸)이 극구 반대하자 그를 멀리 교지(交趾)로 귀양을 보내고 공민왕을 토벌하는 군대까지 보내려 하였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이 때, 박불화가 나서서 말렸다. “우리가 옛 향토지국(鄕土祉國)을 등지고 나오기는 하였을지라도 나라의 어진 학자까지 죽여서야 되겠소. 깊이 생각하여 주십시오.” 기황후는 박불화의 말을 듣고 귀양 간 문익점을 풀어주니, 문익점은 그의 대통 속에 면화씨를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 면화를 전한 거룩한 계기가 되었다. 이 문익점의 공적비가 경남 산청인가에 있는데 지나가다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비에는 이런 일화는 기록되지 않았다. 한편 그 전부터 불화는 자기와의 정열적인 옛사랑을 잊지 못해 몸부림치는 그의 옛 연인 기황후를 만나러 궁에 갈 적마다 역대궁중행실전(歷代宮中行實傳)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의 책들을 구해다가 주며 말했다.
“고국이 그립거든 이 책을 보시오. 사랑이 생각나거든 저 책을 읽으시오.” 하며 달래주었다. 기씨는 비로소 용기를 얻었다 그로부터 기씨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신경을 써서 일체의 잡념을 버리고 얼마가지 않아서 여류문장이 되었으니 진정한 사랑은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황제는 그 많은 황후들과 자리를 같이하여 행사를 하게 될 때마다 기씨가 워낙 행실과 품위가 가을 하늘의 기러기처럼 돋아나므로 마침내 황후 다나실(多那失)을 뒤로 물리고 그녀를 제2 황후로 삼았다가 얼마 안되어 정궁(正宮)자리에 앉히니 천하 제일가는 황후가 된 것이다. 기황후는 그 후로 아들 넷을 낳아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여 원나라 역대 황후 가운데서는 제일 현명한 황후가 되었다. 동서를 통합하는데 징기스칸이 있었고 원제국에 기황후가 있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다 동이족의 후손들이다. 동이족이 중국을 지배하여 원제국을 세웠고 고려의 여인이 그 중국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 후 두 여인이 더 원제국의 황후가 된다. 동이족의 여성들아, 기황후를 연구하라.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아가고 산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간다.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누가 말했던고...
(Fort Lee 한사랑교회 담임목사)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 기씨는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기로 결심. 뛰어난 행실과 품위고 후에 원나라 황후가 된다.
기 황후가 살던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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