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아름다운 호랑나비를 쫓으며 함께 대화하는 버릇이 생겼다. 날개의 가장자리는 진한 청색과 검정색으로 장식되어있으며 날개바탕은 노란색이 단연 우세한 나비다. 화려한 무늬지만 질서정연하게 누군가 정성들여 붓질해놓은 듯 한 나비에게 그만 끌렸다. 사실은 나비 병에 걸린 게 벌써 오년 째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가 어느덧 오년반이 되었으니 이사 온 첫 봄에 꽃밭을 만들면서였다. 그들이 우리 집 정원의 꽃을 찾아 방문해 준 게 너무 반가워서 카메라를 급히 찾아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날개를 활짝 편 선명한 것들만 몇 장 골라 프린트도 했고 직장동료들에게 자랑도 했다. 자태도 아름다웠지만 팔락거리는 날갯짓의 춤은 나에게도 무엇인가를 해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꽃에 머무르다 다른 꽃으로 찾아가 다시 인사하며 사귀는 모습은 수줍지도 않은듯했고, 꽃들이 반겨 맞는 걸 보니 그렇다고 무례해 보이지도 않았다. 선명하며 우아한 차림, 게다가 날렵한 몸짓에 거침없는 율동은 보면 볼수록 나를 매혹시키고 말았다.
삼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따라 느지막한 아침 출근 길 차를 몰고 I-95 선상으로 들어섰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란 호랑나비 한 마리가 앞 차창에 와 머뭇거렸다. 움직이는 차창 앞에서 노는 나비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다행히도 차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그랬는지 나비는 떠나려 하지 않고 작은 날갯짓을 하며 보란 듯이 춤을 추는 게 아닌가. 꼭 무슨 전할 말이 있다는 듯이 한동안 나의 유리창을 살며시 노크 하며. 그때 나는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십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혹 나비가 되어 막내딸의 직장 길을 조금이라도 바래다주고 싶으신 걸까. 나의 창가에서 한동안 팔락거리는 나비를 쳐다보며 어머니 생각에 한참 젖어 있는데 나비는 안녕을 고하듯 잠깐 조금 높이 올랐다 내려오더니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이상하게도 허전한 아쉬움을 맛보았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꽃을 더 많이 심었다. 나비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를 인터넷에서 찾아볼 정도로 관심이 부쩍 늘었고 여러 가지 종류의 꽃을 심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자란 덕에 원래 어려서부터 땅과 흙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요즘 몇 년 새에는 더 더욱 정원을 넓혔다. 땅을 깊이 파서 진흙은 거의 없애고 대신 밑거름과 좋은 흙을 후하게 넣었다. 일년생 꽃도 많이 심었지만 다년생 꽃들도 골고루 잔뜩 심었더니 요즘은 나비들이 예전보다 더 많이 찾아온다. 지난 주말에는 이웃에 사는 친구가 맛있는 고추 멸치볶음을 싸들고 나를 찾아왔다가 활짝 피어있는 오렌지색 앉은뱅이 백일홍이 하도 예쁘다고 탐내기에 그녀를 위해 씨를 담뿍 따주고 있을 때였다. “어머, 이 정원에는 어째서 이렇게 예쁜 나비들이 많아요?” 그녀가 탄성을 지른다. “글쎄, 나비들이 많이 오는 것만은 사실이야. 아마도 내가심은 꽃들이 나비가 좋아하는 꽃들인가 봐.” 하고 대답했지만 어머니가 친구들을 데리고 나를 방문하러 오시는 것 같다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보듯 나비를 보며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게 나 혼자만의 비밀이며 또한 축복이니까.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로 부터 받는 것에만 익숙해 살아온 우리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거나 자식을 결혼시키고 나서야 어머니 마음을 알게 되는가보다. 요즘 들어 어머니의 희생이 가슴 저리게 아파온다. 십여 년 병석에 누워계시던 아버지의 병간호에 유난히도 정성을 쏟으시던 어머니. 자식을 향한 희생 또한 지극해서 막내딸 공부시키기 위해 조반을 지으신 다음 아직 동도 트기 전에 밭으로 나가시던 어머니. 중학교 시절 하굣길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고 학교근처 어느 집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한참을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우산을 가지고 먼 길을 종종걸음으로 찾아오시던 어머니. 여고시절 제주시에서 자취하는 나를 방문오실 때 혹 내가 창피해 할까봐 옆집 신자네 어머니로부터 옷을 빌려 입고 오시던 일, 어머니의 인자함과 따스한 손길을 항상 가슴에 느끼며 살아왔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따스한 말 몇 마디도 나누지 못한 삶이였다.
이제 돌아가신 다음에 아무리 후회한들 소용없지만 어머니의 가르침만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쌀통에서 쌀을 꺼내다가 몇 알이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에 무심코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려 할 때 일러 주시던 말씀, “상수야, 그 쌀 몇 톨이 이 집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몇 사람 손을 거친 줄 아느냐? 깨끗한 건데 주워라, 버리지 말고.”
초가을을 연상시키는 서늘한 공기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다. 이맘때면 앞밭에서 밤고구마를 캐다가 아궁이 불에 구어 먹을 쯤 이었는데 하는 생각에 또 목이 메어왔다. 꽃이나 보면서 슬픈 마음 달래보려고 정원으로 나갔다. 어머니나비라고 이름 붙여준 그 나비와 똑같은 나비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한 꽃잎에 앉아 있었다. 오랫동안 파득거리지도 않던 그 나비는 내가 가까이 가도 꿈쩍도 않았다. 한참을 자세히 보고 있으려니 왼쪽 날개 아래쪽이 연필 두께만큼의 크기로 찢겨나간 게 보였다. 혹 장미 가시에 걸려서 찢기지나 않았나, 어쩌면 제대로 날수 있을지 안쓰럽고 걱정이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생각이 밀려온다. 얼마 전에 부러진 발 때문에 내가 절뚝거리는 게 안타까워 어머니나비도 찢긴 날개를 하고 나타난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비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는데 나비는 조금의 절뚝거림이나 불편도 없이 팔락거리며 날기 시작했다. 날개가 크게 다쳤는데도 별지장 없이 날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한숨이 나왔다.
화사할 정도의 노란 모습에다 우아하게 춤추는 나비를 어머니라고 느낄 만큼 나는 오늘도 어머니를 그리며 산다. 비록 지금 이곳에 안 계신다 해도 느끼는 건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며 보이는 건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 만일 제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또 어머니의 딸이고 싶어요.” 나비와의 대화에 갑자기 눈시울이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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