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대륙 원주민들의 비극은 1492년 크리스토퍼 컬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침략을 신호탄으로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그리고 러시아가 그들의 눈에는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보였던 이곳으로 쳐들어옴으로서 시작되었다. 고대세계는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집트와 황하 문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동이족(東夷族)의 홍산문명(紅山文明)은 황하(黃河)의 그것보다 천년을 앞섰고 동이족이 인류최고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의 주역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뿐만 아니라 미 대륙에도 메소아메리카(Mesoamerica: 중앙아메리카: 멕시코에서 혼두라스 니카라과에 걸친 중앙아메리카)문화와 안데스(Andes)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메소아메리카 문화는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신전문화(神殿文化)였다. 스페인이 침략하기 전 메소아메리카는 이 신전문화가 극치를 이루고 있었는데 세 개의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마야문명, 아즈텍 문명 그리고 잉카문명이었다. 마야(Maya)문화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갖고 있었고 지금도 남미에는 약 1,000만 명이 마야어를 사용하고 있다. 특히 마야문화는 건축, 예술, 천문학, 수학, 철기 그리고 청동기의 기술이 탁월했다. 지금의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과테말라, 벨리스, 치아파스, 혼두라스 그리고 엘살바도르 지역이 그 문화권에 있었다.
마야문화에는 우리의 문화가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아즈텍(Azteca)왕국은 멕시코의 고원지대에 수도를 두고 있었는데 인간을 산채로 신에게 제물
로 드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종교는 세계의 존속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믿었던 태양신에게 매일 인간의 산 심장을 제물로 바쳤다. 그들의 왕궁에는 황금장식과 패물로 가득 차 있었는데 1520년 스페인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약탈당한 후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잉카제국은 지금의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그리고 칠레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 남미의 동부 대초원의 습지와 안데스 산의 고원과 그리고 아마존강의 계곡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미 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수도의 모든 도로는 포장되어 있었고 약 10만 마일이나 되었다. 이들 역시 1533년 스페인 정복자에 의해서 멸망당했다.
당시 잉카인들은 금은을 재산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 하나의 심미의 대상으로만 여긴 것이다. 금은 태양의 땀으로, 은은 달의 눈물로 보았다. 그리고 금은 남성을, 은은 여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황금은 잉카의 그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그들은 황금을 위하여 남미를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왕궁과 사원을 샅샅이 뒤져서 7톤의 금과 13톤의 은을 약탈해갔는데 이는 당시 유럽의 어떤 왕실도 가져보지 못한 양의 금과 은이었다. 스페인의 강도들은 남미에서 그렇게 하여 모은 부를 기반으로 해서 이번에는 북미로 진출한다. 그러니까 남미는 스페인에 의해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그 남미의 원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동이족이다.
배재대 손성태 스페인어·중남미학과 교수는 ‘중남미 고대어에 나타난 우리말 흔적―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은 우리 조상의 것이었다’는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손 교수는 그 증거로 문장구조, 조사, 개별단어 등 여러 측면에서 나와틀(Nahuatl)어(語와) 케추아(Quechua)어(語)에 우리말의 흔적이 매우 많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나와틀어는 아즈텍문명을 건설한 부족의 언어로 지금도 멕시코 등 중미지역에서 약 200만명이 사용하고 있다. 케추아어
는 잉카제국을 건설한 부족의 언어로 남미에서 약 700만명이 사용 중이다.
논문에 따르면, 문장구조의 경우 ‘주어+목적어+동사’로 어순이 일치하며 주어의 생략이 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이, 의, 을/를, 에서, 와/과, 로, 로부터, 끼리’ 등의 조사를 사용하며 그 종류와 쓰임새도 우리말과 일치하고 있다. 우리말이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여럿 있다.
‘나와틀’이라는 말 자체가 나와(나)+틀(복수형어미 ‘들’) 즉, ‘우리’가 지금도 남아있는 예라는 것이다. 아즈텍(Aztec) 역시 스페인어 발음으로는 ‘아스떽’이며, 이는 곧 ‘아사달’이라고 했다. 날(nal), 오다(wala), 가다(ga), 여기(ye), 누구나(noo’yuna), 어제(izi’i) 등도 우리말과 일치한다. 손 교수는 “직접적인 관련 없이 이처럼 공통점이 많기란 불가능하다”며 “세계 문화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깜짝 놀랄만한 큰 발견”이라고 주장했다. 손 교수는 “인류가 베링해협을 건너 미주 대륙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다”며 “언어적 관점에서 그 증거를 찾아낸 셈”이라고 말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보다 훨씬 늦게 미 대륙을 침략했다. 스페인이 처음부터 황금을 목적으로 침략을 했다면 영국은 대륙의 땅을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땅 대륙에는 이미 우리의 동이족이 대륙의 토지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1607년 영국인들은 지금의 버지니아의 체사피크(Chesapeak)만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영국왕 제임스 1세는 1606년 런던 버지니아 회사에게 미 대륙에 영국의 영구한 식민지를 건설하라는 칙허를 내렸다. 그들이 약 100여명의 농사꾼을 데리고 지금의 제임스 타운으로 이주를 했는데 그 곳의 원주민은 포하탄 족이었고 지도자는 와훈소나코크(Wahunsonacock) 였다. 이 지도자는 자기 땅을 찾은 영국손님을 정중하게 그리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런데 이 영국 오랑캐들은 자기들의 우월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들의 환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전혀 감사한 줄을 몰랐다. 그로부터 약 1년 후 그들의 본성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1644년 포하탄은 영국침략자들에 의해서 땅도 문화도 다 잃었고 지금까지도 그 실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필그림이 플리머쓰에 상륙한지 10년이 되던 1630년 1,000명의 영국인을 17척의 배로 매사추세추만에 상륙시켰다. 이들은 미국땅에 ‘완벽한 기독교 사회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걸고 왔다. 그리고 그 후 영국은 해마다 1,000명의 자국인을 보냈다. 인디언들은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다. 땅은 사유화 할 수 없는 것이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이들의 상반된 개념은 이 땅에 불길한 암운을 드리우는 예고편이었다. 1637년 영국침략자 존 마손 대
위는 90명의 병사를 가지고 페쿠오토 인디언 700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영국인들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민족이라는 오만함을 가지고 세계도처의 땅을 유린하며 원주민들을 정복해 나갔다. 그들은 선량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동이족 인디언을 야만인으로 간주하여 학살하고 그들의 문명을 말살시켰다. 요한계시록 6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 지 하시려나이까 하니...아직 잠시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무고한 우리의 동이족을 학살한 스페인과 그들, 프랑스와 그들, 네델란드와 그들, 러시아와 그들은 모두 공히 그들 선조들의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公義)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534년 북쪽에서 남쪽으로 쳐들어왔다. 지금의 퀘벡시에 상륙한 최초의 프랑스의 침입자는 장쟉크 까르띠에였다. 1673년 루이스 졸리에는 미시시피강 양안(兩岸)토지를 프랑스땅이라고 일방적으로 정하고 루이 14세 이름을 붙여서 루이지애나로 명명하였다. 참으로 버르장머리 없기는 프랑스도 영국에 못지않았다. 프랑스의 주력사업은 모피사업이었다. 이들은 인디언과의 충돌이 많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원주민의 땅을 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는 1602년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고 대륙과 무역거래를 시작했다. 1620년 뉴욕의 네덜란드 식민지 총독 피터 미누이트는 그들 돈으로 60길더 미화 24달러 상당의 물품을 쉬네코크(shinnecock) 인디언에게 건네주고 맨하탄 섬을 차지했는데 건네준 물건은 낚시바늘, 유리제품같은 경공업 제품이었으니 이들 인디언들도 토지의 공개념만 있었지 사유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그 섬을 그렇게 팔아넘긴 것이다.
이들은 선교사업에도 열심을 내어서 뉴욕과 뉴저지에 많은 교회를 세웠으니 바로 리폼드 교회다. 장로교회의 창시자 칼빈의 신학과 신앙이 스코트랜드로 건너가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가 되었고 네델란드로 건너가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발전시켰다. 이들이 미 대륙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은 뉴져지 뉴브론스윅에 뉴브론스윅 신학교를 세운 일일 것이다. 미국 최고의 신학교인데 이 학교 졸업생 언더우드가 바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은 분이다. 이 신학대학원 도서관 2층 서고에 가면 언더우드의 한국어 저작물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이 신학대학원이 한국교회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을 경주할 당시 나는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총장 캔스필드 박사를 한국의 여러 교회들에게 소개를 해주었고 지금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언더우드와 뉴브론스윅 신학대학원 덕분에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의 꽃을 피웠다.
1741년 러시아 백인들이 수달의 모피를 구입하려고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로 침입해 들어왔지만 식민지 건설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백인 침략자들은 원주민이자 우리와 같은 동이족 인디언과의 공존공생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를 않았고 무조건 모든 것을 강탈해 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인디언들 고유의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무시했으며 그들의 문명을 송두리째 엎어 버렸다. 컬럼버스 침입 이후로 유럽의 상인, 광부,농부, 군인, 모험가, 선교사들이 인디언 마을을 찾았다. 그 때 원주민들은 낯선 방문객을 정성을 다해 대접했다. 그런데 그 대가는 무엇이었나?
고대잉카 문명 유적지인 마추픽추에는 태양의 신전을 비롯, 볼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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