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소 냉전의 대표적 상징물이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게 11월 9일로 20년이 되었다. 1982년 필자가 서부 베를린에 브란덴베르그 궁전문 부근에 있던 찰리 지점을 통과하여 동 베를린에 가서 반나절을 보냈을 때가 회상된다. 서독 정부의 초청 여행이었지만 동 베를린 왕복만은 자담해야 된다고 해서 같이 갔던 교수들 두 명과 함께 달러를 동독 돈으로 얼마 바꾸어 소련군의 2차 대전 전승 기념탑 있는 데와 박물관을 주마간산으로 둘러보았는데 동독 거리 풍경이 후진국 그자체였었기에 남한과 북한의 대조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어떻게 허물어졌는지에 대해서 여러 책들이 출판되고 그 원인과 역사적 의미에 대한 구구한 해석이 등장하는 시점이 되었다. 자본주의(미)와 공산주의(소련) 체제의 경쟁에서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모순 때문에 공산주의의 종언을 예고하는 서막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게 많은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 체제가 온 세상을 평화스럽게 발전시킬 것이라는 소위 새 세계 질서에 대한 섣부를 기대는 산산조각이 되다시피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미국 보수 진영의 논객들은 1987년 베를린 장벽 앞에 서서 ‘고르바초프씨, 이 장벽을 허물어트리시오“라고 외친 레이건 대통령의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미소의 군비 경쟁으로 파탄이 난 소련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한 체제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을 과감히 시도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위성국들의 내부 불만폭발을 1950년대의 동독과 헝가리 등의 반소 민주화 데모에 소련군을 투입해서 진압했던 전례에 따라 대응하지 않겠다는 시사를 한 것이 피 한 방울도 흘림이 없이 베를린 장벽을 허물어트린데 기여한 것만은 틀림이 없겠다.
그러나 11월 9일에 장벽이 무너진 직접적 도화선은 역사의 우연과 서방 미디아의 역할이었다는 해석이 대두되고 있다.
1989년 11월 초에 동독인들은 고르바초프식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적 데모를 벌렸었다. 동독 공산 독재자들은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함으로써 데모대들을 달래려고 시도 했던 바 소련과 사전 조율도 거치지 않았고 또 베를린 장벽 경비대에게도 별도의 지시도 없이 그러니까 11월 9일에 장벽을 통한 여행의 자유화를 실천에 옮길 생각이 없이 그리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 6시경 정부 대변인 역할을 했던 동독 공산당 정치국원 한 사람이 해외 특파원들을 포함한 기자회견을 담당했던바 한 시간 가량 계속된 회견이 지루할 저도였었는데 끝날 무렵 이태리의 기자 질문에 그는 새 여행법이 “즉각적으로(immediately)” 발효한다는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통신사 기자들이 본사로 급히 타전을 한 결과 7시 3분에는 베를린 장벽이 열린다는 기사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기 시작한다. 독일 TV 채널이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동독은 베를린 경계선이 누구에게든지 즉각적으로 열린다고 발표했다”는 보도를 했다. 이북과는 달리 서독 채널을 볼 수 있던 동독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다.
장벽 부근에는 완전 무장한 동독 경비병들이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군중들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지자 경비병들은 군중들을 하나씩 둘씩 조사하고 경계선을 넘게 했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군중들이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라”고 아우성치는 데는 당할 수가 없어 11시 30분경에 경계 차단목을 들어 올려 동독인들이 대거 서 베를린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28년간 동서 베를린을 나누었던 경계선이 잠간 사이에 사라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라지만 고르바초프와 소련 고위층이 잠자지 않았더라면 또 동독 독재자들이 발포 명령을 했더라면 무혈로 장벽이 사라지는 일이 불가능했었을 런지도 모른다.
휴전선이 베를린 장벽처럼 평화롭게 사라질 수 있을까? 김정일의 선군주의 아래 백만 대군이 남한을 향해 호시탐탐 노리는 상황에서 가능해 보이질 않는다. 더군다나 지뢰밭이 되다시피 폭발물이 총총히 박혀 있는 소위 비무장지대를 통해 북한인들이 남쪽으로 넘어온다는 게 불가능 할 것이다.
비슷한 공산국으로 2차 대전 후에 출발했지만 동독에서는 적어도 일당 독재였지 1인1가족 세습 독재가 아니었고 동독인들이 서독 미디아의 보도에도 접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북한 사람들의 암담한 실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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