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여. 스페인의 세비야를 떠나 그라나다(Granada)로 향합니다. 설익은 정을 애써 떼어버리고 날만 새면 새 곳을 찾아 떠나는 나그네 여정입니다. 몸은 바람처럼 훠이훠이 떠나는데 마음은 두고 온 옛정이 그립습니다. 리스본의 노란 전차와 세비야 강변의 카르멘 동상이 눈에 어른거립니다. 인생길에서 어느 누가 옛정의 푸근한 포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안락한 버스 좌석에 묻혀 잠시 눈을 붙인 사이 꿈결에 ‘알함브라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듣습니다. 이 감미로운 기타 곡은 내 젊음의 옛정이 녹아 있는 노래입니다. 나는 이 곡을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이 방황하던 시절, 선배 방에서 들려오는 이 선율은 내게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던 때에 큰 세상엔 낭만과 음악과 사랑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주었습니다.
’알함브라의 추억’의 선율에 취하면 별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납니다. 나는 두 개의 기타합주인 줄 알았는데 트레몰로 주법으로 켜는 독주임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의 기타의 대가 ‘타레가’가 그라나다의 언덕에서 그 옛날(1896) 만든 곡임을 알고 알함브라는 내게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K형. 반백이 되어 그 옛정 앞에 섰습니다. 형도 알다시피, 알함브라 궁전은 711년부터 스페인을 800년간 다스렸던 이슬람의 마지막 왕조, 나사리의 최후 거점이지요. 유럽이 중세의 암흑시대를 지날 때 이슬람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많은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해 중세 문화와의 가교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크게 발전된 이슬람 문화가 알함브라를 가능케 한 것이지요. 극단주의로 치닫는 금세기 이슬람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아내와 손을 잡고 알함브라 궁전으로 오릅니다. 측백나무들이 늘어선 언덕 길 양옆으로 시에라네바다의 눈 녹은 물이 시원하게 흐릅니다. 코란의 에덴동산을 본 땄다는 ‘헤네랄리페’ 정원에 들어섰습니다. 장미, 오렌지, 측백나무 등의 정원수들과 단정한 분수들이 물을 뿜고 있습니다. 자연과 조형미를 융화시킨 흔적이 여성적이고 부드럽습니다.
왕궁 정면에 가늘고 우아한 석주가 지탱하는 7개의 말굽 아치가 보입니다. 그 위로 붉게 빛나는 높이 45m의 ‘코마레스’ 탑이 커다란 직사각형 연못 속에 고스란히 빠져 대칭의 환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국의 꽃이란 ‘아라야네스’ 뜰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안달루시아의 푸른 하늘 속에 연못이 빠져 있습니다.
왕궁에서 가장 넓은 대사의 방. 천장의 상감세공과 벽의 석회세공, 벽면을 장식한 아술레호(그림타일)까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파노라마입니다. 이슬람 교리에 따라 사람이나 동물 대신 꽃, 과일, 아라비아 문자들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됩니다.
궁내 아라베스크 문양의 압권은 단연코 ‘모카라베’라고 부르는 종유석 장식이었습니다. 왕의 할렘, 사자궁전 속의 ‘두 자매의 방’ 천장에 달린 종유석 조각은 정교한 우려함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듯도 하고, 은하계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작게 보아서는 수많은 벌집이 매달려 있는 듯도 합니다.
K형. 장식미의 극치를 보며 의문이 떠나질 않습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시기에 어떻게 이런 궁전을 지었을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최후를 예감하면서 더욱 탐미에 빠져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 ‘보아브딜’은 궁전 열쇠를 스페인 왕에게 넘겨주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그는 ‘무어족의 마지막 한숨’이란 언덕에 올라 궁전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400년 후 타레가가 켤 ‘알함브라의 추억’을 영감으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벗이여. 알함브라는 누구에게나 영원한 추억인 듯합니다.
김희봉 / 환경 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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