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장하는 동아시아지역과 보다 밀착된 경제협력의 필요성에 착안한 것은 ‘백인의 나라’ 호주였다. 영국연방국가이지만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소외감을 느끼던 호주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빠르게 발전하며 눈부시게 성장하는 동아시아였다. 지리적·경제적으로 유럽보다 가까운 아시아지역과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호주는 자신도 ‘아시아국가’임을 못 박아 두기 위해 경제협력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1989년 호주 캔버라에서 제1차 회의를 가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이렇게 탄생했다.
창설이 쉽지만은 않았다. 60년대부터 활발하게 움직여온 동남아국가연합(ASEAN)이 정면으로 반대하며 대신 동아시아만의 경제협의체로 만들라고 제의했다. 미국과 호주, 캐나다 등 아시아가 아닌, 백인국가들은 배제해야 한다는 속뜻이었다. 이때 아세안의 제안을 강력반대하며 미국의 편에 서서 아시아-태평양 협력체 강행을 적극 주장한 것이 일본이었다.
처음엔 각료회의로 출발했던 APEC은 시애틀에서 개최된 제5차 회의부터 정상회담으로 격상되었다. 아시아 국가들끼리의 결속은 막아야겠다 싶었을 뿐 처음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미국이 뒤늦게 아시아 경제의 비중을 체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전까지 미국은 태평양 쪽은 곁눈으로 흘깃할 뿐 대서양 건너 유럽에 연연해 왔다. 한국은 물론 중국도, 일본도, 대서방 무역에 목매고 있는 한 수 아래 보호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무섭게 성장해 버린 아시아를 보며 손잡는 단계를 넘어 미국 스스로가 ‘아시아의 일원’이 되어야겠다고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LA타임스는 APEC 특집기사에 이런 제목을 달았다 : ‘미국은 아시아 국가가 될 수 있을까’
APEC은 올해로 창설 20주년을 맞았다. 세계인구의 40%가 살고 있는 21개 회원국은 세계총생산고의 54%, 무역량의 44%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아시아의 일원임을 자부하며 APEC을 축으로 아태지역의 경제통합 정책을 추진하려는 미국에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세상이긴 하지만 20년전 미국 배제를 앞장 서 반대해주던 일본이다. 유키오 하토야마 신임총리가 집권하자마자 미국을 제외시키는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제시한 것이다. 아시아지역 통합의 주도권을 노리는 중국과, 앞으로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주장하는 일본이 의기를 투합한다면 이곳에서의 미국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시아는 더 이상 ‘종래 미국이 알고 이해해온 아시아’가 아니다.
오늘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에 나선다. 8일간 한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APEC 개최지인 싱가포르 등 4개국을 방문한다. 취임 후 벌써 16개국엘 다녀 온 오바마 해외순방은 유럽과 남미, 중동과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 특유의 스타파워를 발휘하며 무난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시아는 오바마에게 가장 힘든 외교무대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아시아 순방은 오바마가 오랫동안 별러온 나들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오바마 개인의 친근감도 있지만 이라크전과 테러전쟁에 몰두한 부시외교가 소홀히 했던 아시아와의 파트너십을 오바마 행정부는 처음부터 미국국익의 중대한 요소로 강조해 왔다.
떠나는 오바마의 발걸음은 별로 가볍지 못할 것이다. 최악으로 치닫는 실업률과 막바지 진통을 겪고있는 헬스케어 개혁안, 아프간 추가 파병 등 산적한 국내 어젠다들이 발목을 붙잡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번에 들를 방문국 어느 하나도 만만한 곳이 없다.
성과에 대한 예상도 엇갈린다.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는 오키나와 미군기지, 한국이 고대하는 자유무역협정(FTA) 의회비준과 북한의 핵위협, 중국과의 무역분쟁·위안화 절상요구 등 “현재 가장 시급한 미완의 이슈들은 오바마 순방 이후에도 계속 미완으로 남을 것”이라며 월스트릿저널은 기대의 싹부터 잘라버렸다, 반면 오바바의 순방은 중국의 파워가 급증하는 아시아에 미국의 영향력을 재확인시키는 확실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 또한 만만치 않다.
“미국은 멀리서 구경하는 방관자가 아니다. 처음부터 동참해온 주요 당사자다. 미국은 여기 아시아 속에 머물 것이다”라고 제프리 베이더 국가안전회의 아시아국장은 말한다. 오바마 행정부의 이런 신념이 이번 순방에서 얼마나 전달될 지는 아직 점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 다른 기대가 자라고 있다.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시각변화다. 종래의 피보호자를 향한 경시나 위협적 경제적수에 대한 증오의 시선은 빠르게 걷히고 서로 도와 발전하는 동등한 파트너로서 존중하는 시각이 대신 자리 잡는 것이다. 이같은 변화가 미 정책 곳곳에 반영되어 자연스럽게 일반인의 의식 속에 뿌리내리면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미국인의 시선 또한 변할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깊어지고 언어습득에 대한 필요성과 아시아 전문가에 대한 수요도 급증할 것이다. 아시아와 긴밀한 유대가 필요한 미국을 위해 아시안 아메리칸이 얼마나 귀중한 ‘미국의 자산’인가도 깨닫게 될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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