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 40대 백인 친구의 ‘한국어 연설대회’ 준비를 좀 도운 적이 있다. 그는 나이 든 한인이 손을 봐 주었다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연설문을 밤이고 낮이고 외웠다. 기자의 역할은 그것을 듣고 발음을 교정해 주는 일이었다.
“여러분은 그리움 때문에 마음이 아파 본 적이 있습니까? 가족이 그리워서? 고향에 가고 싶어서? 아니면 친구를 만나고 싶어서? 저는 한국이 그립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립습니다.(중략)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그러니까 1984년에 저는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교환학생으로 연세대학교에 가서 1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그 기간은 제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미치도록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중략) 저는 한국에 돌아갈 날을 그리며 한국말을 열심히 배웠습니다. 한국 TV를 보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도서관에 가서 말을 걸고 한국 수퍼마켓, 한국 은행, 한국 미용실을 이용했습니다. 심지어 일요일에는 한국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언젠가 머지않은 미래에 꼭 다시 한국에 돌아가 한국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도 떨고 노래방에도 가고 25년간의 그리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저는 정말 한국에 다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매불망 그리던 한국에 다시 가려는 그의 꿈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감동적인 내용이었지만 한국문화원이 한국어반 수강생들의 실력향상을 위해 연 이 대회에서 2위에 그쳤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1위 수상자에게만 한국여행이 부상으로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후로도 지치는 기색 없이 기자에게 한국어를 배우다 궁금한 점을 수시로 물어 온다.
그의 끈질긴 한국어 사랑을 생각하면 모국어를 대하는 우리의 안일한 자세가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한국이고 미주 한인사회고 간에 잘못 쓰는 우리말이 지천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모국의 고급 호텔 화장실에서 ‘쓰고 난 타월은 욕조에 비치해 주십시오’라는 안내문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물론 ‘비치’란 필요할 때 쓰기 위해 마련하여 갖추어둔다는 뜻이다. 70년대 한국 TV에서 방영된 외화시리즈의 제목인 ‘날으는 원더우먼’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듯 요즘도 기세 등등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뉴스 검색을 해 보니, 우리말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날으는’이란 단어가 1,088개나 좌르르 쏟아진다. 언론이 이 지경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이 경우에 ‘나는’이라고 쓰면 뭔가 어색하다는 사람들이 꽤 된다. 방송의 위력 때문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조차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교회에서도 통한다. 기독교인들이 잘못 쓰는 대표적인 표현이 ‘하나님, 누구를 축복해 주옵소서’이다. ‘축복’이란, 빌 축(祝), 복 복(福), 말 그대로 ‘신의 은혜를 구하여 비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축복하지 않는, 축복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복을 직접 주는 주체가 아니라 누구에겐가 복을 빌어주는 존재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명령의 일부인 창세기 12장3절에도 적확하게 나와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그럼에도 신학적으로도 엄청 잘못된 ‘하나님의 축복’이란 표현이 ‘복’이란 말을 아예 밀어내고 날마다 회자된다.
문제는 여기 든 예들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우리 모두가 우리말 바로 쓰기에 지극히 둔감하다는 데 있다.
아주 오래 전 커뮤니티칼리지 도서관 서가를 살피다 눈길을 끄는 책을 발견한 적이 있다. 영어제목이 기억나진 않지만 번역해서 ‘기술 분야의 영어문장을 정확하게 쓰는 법’ 비슷한 것이었다. 거기엔 그 분야 종사자들이 자주 범하는 오류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민자로 살면서 미국교육이 모든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영어 구사를 얼마나 야무지게 가르치는가를 숱하게 깨달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미국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고 실감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국어는 한민족의 얼이다.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고운 우리말’이라는 이해인 시 구절을 떠올리며, 우리말을 정확하게 배우고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자신을 반성해 본다.
김장섭 /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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