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국주의가 저지른 과거의 만행과 관련해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한국과 중국, 이웃 아시아국 지도자들은 정말로 원하고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필요할 때 일본 때리기를 할 수 없을 테니까. 이코노미스트지의 지적이다.
‘역사 전쟁’이란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의 역사적 반성이라는 해묵은 문제를 둘러싼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의 갈등을 파헤치면서 이 같이 꼬집은 것이다. 그러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일본과 이웃 국가들 간에 진정한 화해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역사가 중요하다. 과거사의 올바른 정리는 한 국가사회의 현재의 삶, 미래의 진로와 직결된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은, 그래서 묻혀 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 이런 과거는 사실에 있어 과거가 아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말이다. 현재에도 살아 있어 그 상처의 아픔을 통렬히 느낀다. 이런 과거는 화해를 막는다.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고통 속에 사람을 가둔다.
도미니크 모이지란 역사학자는 이런 과거의 상처,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지역을 발칸반도로 지적한다. 1차 세계대전의 진앙지였다. 그 발칸지역은 냉전종식과 함께 90년대에 또 한 차례 유혈사태를 맞는다.
그 결과 자신의 아픔에만 파묻혀 남을 헤아리지 못한다. 결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반대의 경우가 있다. 과거사를 망각이라는 심연에 가두는 것이다. 침묵이 강요된다. 그리고 선전선동이 난무한다. 영광의 사실만 부각시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다.
60년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는 엄청난 고통과 영광이 점철된 역사다.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이 굶어죽었다. 60년대 문화혁명으로 중국사회는 미증유의 혼란에 봉착했었다.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
중국의 신세대는 그러나 이 역사 사실을 잘 모른다. 외국인이 그런 사실을 거론하면 새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공연한 시비로 받아들인다. 거짓말로 일관된 역사교육의 결과다.
과거사의 올바른 정리가 왜 필요한가. 거짓말을 가르치는 역사. 이런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법치사회 구현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그런 역사를 되풀이 할 위험성이 크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나라에서 흔히 대두되는 게 배타적인, 그래서 극히 위험한 내셔널리즘이다.
올바른 과거사 정리, 다시 말해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적 오류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 이야기가 길어진 건 다름 아니다. 한 가지 이상주의가 대두되고 있다. ‘베세토(북경, 서울, 도쿄의 두 음자를 합친 말)의 꿈’이 담론으로 굳어지면서 동아시아 공동체란 새로운 블록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어서다.
그 구상은 이미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장기적 목표로 제시됐다. 아시아 외교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중국·일본을 주축으로 한 동아시아는 그러면 유럽연합(EU)에 버금가는 공동체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한·중·일 세 나라가 지니고 있는 경제적 무게를 가늠할 때 상당히 긍정적이다. 이 세 나라의 경제규모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합계를 넘어섰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이 동아시아 세 나라의 국내총생산(GDP)비중은 전 세계의 16.12%로 영·불·독의 15.22%보다 크다.
‘베세토’간의 교류도 활발하다. 세 나라를 잇는 관광객들이 넘쳐난다. 역내 교역량도 대미 교역량을 능가했다. 그러나 역사적 인식이란 점에서 볼 때 ‘베세토의 꿈’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앞서 인용한 이코노미스트지의 보도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평화를, 공생공영(共生共榮)을 외친다. 그러나 잔잔해 보이는 흐름 아래로는 급류가 흐르고 있다. 역사 전쟁이다. 그 역사 전쟁은 영토분쟁으로 이어지면서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의 부딪힘을 불러오고 있다.
자기반성, 성찰의 도구로서 역사는 배격된다. 자화자찬의 역사만 역사로 받아들인다. 올림픽의 영광만 선전하는 중국이 그 전형으로, 일본과 한국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진실에서 벗어난 왜곡된 역사에 함몰돼 있기에는 마찬가지라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지적이다.
결론은 무엇인가.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비롯된 ‘동아시아 공동체’는 군국주의 일본이 주창했던 ‘대동아공영권의 악몽’으로, 혹은 ‘중화지상주의 천하론’으로 변질 될 수 있다.
유토피아로 시작돼 현실로 끝나기까지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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