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 정숙이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삼 십여 년 전,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의 짝꿍이다. 유난히 조용하고 말이 없어서 내 옆에 짝꿍이 있는지 없는지, 한참 동안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를 새롭게 보게 된 계기는 내 노트 한쪽 귀퉁이에 긁적거려 놓은 낙서였다. 지금은 무슨 말을 썼는지 기억이 없지만, 나의 심경을 흘려 놓았던 몇 줄의 메모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을 옆에서 흘깃 읽어 본 정숙이는 그 글이 좋다며 어찌나 좋아하는지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차츰 친해졌고 정숙이는 나를 자기 집에도 자주 데리고 갔었다. 청도인지 청송인지 ‘첫’자가 ‘청’자는 확실한데 지명은 불확실하다. 그곳이 고향인 친구는 우리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한 살 아래 여동생과 대구 동구 신암동에서 자취했었다. 그 집은 절 안에 있었으며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한참 걸어 들어갔다. 부엌이 딸린 방 한 칸만 달랑 지어진 집이었는데 아마 정숙이 집안과 어떤 연고가 있는 스님이 배려해 준 집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웅전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작은 집은 주변에 나무들이 많아 마치 숲 속의 외딴 집 같았다. 겉보기와는 달리 그 작은 집 안으로 들어가면 방바닥이 따뜻하고 아늑했는데,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묵직한 벼루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한 적 해 보이는 그 작은 집은 가끔 쑥스런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그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장래 희망도 키우고, 어른이 듣는다면 철부지 같은 심오한 인생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정숙이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으며 이다음 아버지를 닮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아버지를 좋아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다지 자랑할 만한 분은 아니어서 아버지를 닮은 신랑감은 싫었다. 아버지를 존경하는 정숙이가 부러웠으며 상대적으로 시골에서 힘들게 일하시다 논두렁을 베개 삼아 곤하게 낮잠을 취하시던 아버지의 밀짚모자가 아른거려 죄송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국수를 따로 삶아 건져 채반에 담아 보자기에 싸고, 국숫물은 주전자에 담아 들에 계시는 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심부름을 보내면 나는 곧장 갖다 드린 적이 별로 없었다. 들에 핀 삐삐랑 들꽃을 꺾느라 정신없다가 싫증이 날 쯤에야 정신이 번쩍 들어 보따리를 찾아 아버지께 갖다 드리지만, 아버지는 화를 내는 일이 없으셨다.
오히려 밀밭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셔서 섬뜩한 낫자루로 밀 단을 한 아름 쓱 짤라 불을 피워 구운 다음, 큼지막한 손으로 쓱쓱 비벼 껍질은 입으로 불어서 날려 보내고 말랑말랑한 초록 밀알만 내 작은 손에 흘러 넘치도록 수북이 쥐여 주시고서야 불어 터진 국수를 드시곤 하셨다. 입 주위가 까매진 줄도 모르고 두 볼이 터지도록 맛있게 밀알을 씹는 것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자상한 눈매가 나의 양심을 옥죄었다. 아버지 같은 신랑은 아니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를 호강시켜 드릴 멋진 신랑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이야기로 가득 찬 그 작은 집은 이제 내 가슴으로 옮겨 와 삼십여 년의 삶을 조명해 볼 소중한 이야기 창고로 자리 잡았다. 그 이야기 창고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보면, 밥 한 그릇을 맛있게 먹은 콩 잎이 지금도 침샘을 자극한다. 어머니가 두 딸을 위해 손수 장만해 오신 그 콩 잎은 소금물에 노랗게 삭힌 것이었다. 삭힌 콩잎을 찬물에 헹구어 소금기를 뺀 다음 꼭 짜서, 참기름, 깨소금, 파, 고추, 다진 마늘 등 갖은 양념을 넣고 만든 샘표간장을 콩잎 한장 한장 가지런히 놓고 발라 정숙이와 내가 굳건한 믿음을 쌓아가듯 켜켜이 쌓았다. 그렇게 만든 콩잎을 하얀 쌀밥에 한 장씩 얹어서 먹으면 그 감칠맛이 기가 막히다.
요즈음처럼 입이 까칠한 날엔 그때의 그 짭짤한 콩잎 한 접시만 있더라도 밥 한 그릇은 후딱 비울 것 같다. 나의 이야기 창고에는 저만치서 들려오는 목탁소리도 있다. 처음엔 그 소리가 음산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청승맞게 들려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어떻겠냐고 자주 제안도 했지만, 정숙이는 그 소리가 맑고 고요하다고 했다. 정숙이는 빙긋이 웃으며 소리를 밀어내지 말고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고 했다. 나도 정숙이의 말에 서서히 감염이 되어 점차로 목탁소리가 싫지만은 않았다. 어느새 낯익은 소리로 흡수되어 편안하고 운치가 있었다. 같은 음량으로 일정하게 들리던 목탁소리가 울림도 다르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느낌도 달랐다. 목탁소리의 여운은 항상 그 작은 집 안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나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두 아이를 둔 중년부인이 되어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지만, 확실히 정숙이는 내적으로 성숙한 아이였다. 정숙이는 내향적 성격의 아이여서가 아니라 감정에 별로 흔들림도 없었다. 평정을 잃지 않고 언제나 곱고 차분한 성정은 타고난 천성도 있었겠지만, 아마 붓글씨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린 아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정숙이는 큼직한 벼루에 먹을 갈아 굵은 붓으로 먹물을 듬뿍 찍어 화선지에다 윤동주의 ‘서시’를 자주 썼다.
그 자태가 마치 한 폭의 학 같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쓰고 또 써 내리던 정숙이의 붓끝을 따라 익혔던 시구가 나의 뇌리에 박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늦었지만, 중년의 후반에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처럼, 돋보기를 끼고 느릿느릿 파란 형광펜으로 밑줄을 쳐가며 문학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은 아마 그때, 정숙이의 영향이 내재한 잠재의식의 일로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 밤은 먼 이국땅 버지니아 하늘에도 별이 총총하다. 양 갈래 머리를 단정히 땋아 내리고, 그 작은 집 문밖에 나란히 앉아서 ‘별을 헤는 밤’을 함께 읊조렸던 그 밤만큼이나. 정숙이는 출근하는 남편 대신 병상을 지켜주시던 시아버지의 지극정성에도 살을 깎아 먹는 암이라는 녀석에게 제 살 다 내어 주고, 시 한 수 마지막 기도처럼 읽고는 일찌감치 하늘나라로 갔다. 별꽃 피는 하늘이 이제 그녀의 정원이 된 저곳에서 정숙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혹여 이 땅에 오래도록 발붙이고 서서 분별없이 사는 나를 안쓰럽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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