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에는 앞선 행위와 모순되는 나중의 행위를 금지하는 원칙이 있다. 법을 공부했거나 부동산 학교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몇 번쯤은 들어봤을 ‘에스토펠’(estoppel)이 그것이다. 영미법에서 생성된 이 원칙은 이미 표명한 자기의 언행과 모순되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금반언(禁反言)의 원칙’, 즉 말을 뒤집는 것을 금하는 원칙으로 번역된다. 계약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개념으로, 신의성실의 원칙이라고 보면 된다.
‘금반언의 원칙’은 법률상으로는 아주 엄격히 적용되고 있지만 사회규범으로서는 아무런 강제력이나 구속력을 지니지 못한다. 법률적 사안이 아닌 다음에는 내가 한 말과 행동을 뒤집는다고 해서 처벌 받는 일은 없다. 마음 속 갈등과 타인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잠시 불편할 뿐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법률이 아닌, 규범으로서의 ‘금반언의 원칙’이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로 가늠해 볼 수 있다. ‘금반언의 원칙’이 잘 자리 잡고 있는 사회에서는 이중잣대가 설자리가 별로 없다.
하지만 이중잣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보통 자기에게 적용하는 기준과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물리학의 세계뿐 아니라 우리들의 의식까지 지배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면 야동이지만 내가 보면 지침서이고 특히 내가 받는 비판은 파괴적이고 내가 하는 비판은 건설적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지난 주 민주당 소속인 매서추세츠 주지사는 지난 8월 사망한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의 후임을 지명했다. 주지사의 후임 지명은 다수당인 민주당이 주지사에게 임명권을 주는 법안을 가결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5년 전 존 케리 연방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는 매서추세츠 민주당 주의원들이 공화당 미트 롬니 주지사가 후임을 임명할 수 없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공화당 주지사 시절에는 주지사에게 임명권을 주는 게 옳지 않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법률을 바꿔 주지사에게 임명권을 주었다. “모순과 위선의 정치”라는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이런 이유로 반대표를 던진 민주당 의원들도 몇몇 있었다. 몇 년 사이에 달라진 입장에 대한 질문에 민주당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이중잣대가 가장 횡행하는 분야는 물론 정치다. 정치선진국이라는 미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당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은 물론 주기적인 공수교대로 입장이 바뀌다 보면 한 가지 언행을 시종여일하게 지켜 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간혹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바꾸고 오리발을 내밀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말 바꾸기가 비껴갈 수 없는 현실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정도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몇 년 전 “공직 수행에 결정적인 결격 사유”라고 성토했던 문제점들을 “아주 작은 흠결”로 둔갑시키는 것은 낯 뜨겁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는 이런 반언들과 궤변들로 넘쳐났다. 입장을 바꾼데 대해 이해를 구하기 위한 해명은 커녕 머쓱한 표정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수의 진정한 힘은 도덕에서 나오는데 흠결투성이 후보자들이나 이들을 무조건 감싸려고만 드는 팔색조 정치인들에게서는 이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힘 있는 언론들의 무치도 마찬가지다. ‘금반언의 원칙’이 튼튼한 사회규범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얼마 전 하버드 대학 MBA 졸업생들의 절반가량이 ‘MBA 선서’에 자발적인 서명을 하고 졸업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의대 졸업생들이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기업 경영을 하는데 있어서도 윤리를 추구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월가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 이것을 흉내 내 정치인들에게도 임기 시작에 맞춰 ‘금반언의 선서’라도 시킨다면 위선 바이러스에 심하게 오염돼 있는 수질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수 있으려나.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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