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 국토 종단기 <21> 영월 단종문화제
한양백리 내 아닌 지방에 모신 유일 왕릉
기암괴석 어우러진 영월은 ‘강원도 보석’
일찍 일어났다. 한때 비가 오겠다는 일기예보다. 주인아저씨께 단종능 가는 길을 물었더니, 장릉(莊陵)가시냐며 2킬로쯤 된다고 말해준다. 신새벽에 ‘환경지킴이’라 쓴 노란색 조끼를 입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 길 따라가며 쓰레기를 줍고 있다.
표지판을 따라 단종능을 오른다. 솔잎에 이슬이 맺혔다. 적막하다. 초등학교 시절이던가, 눈물을 흘리며 ‘단종애사’란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살아난다.
단종(端宗).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열두 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2년 후인 열네 살 때 정순왕후를 맞이하고 열다섯 살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세조 2년 열여섯 살에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1457) 10월24일 사약을 받고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단종의 주검이 동강에 버려졌으나 시신에 손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추상같은 어명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때 영월호장 엄흥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지게에 지고 가 영월 엄씨 선산인 동을지산에 매장했다. 엄홍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숲속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린다. 단종이 열여섯 살에 지었다는 자규시(子規詩)를 떠올린다. 남아 있는 시 한수를 통해 어린 임금의 애끊는 심정을 짐작할 뿐이다.
< 一自寃禽出帝宮 / 孤身隻影碧山中 / 假面夜夜眠無假 / 窮恨年年恨不窮 / 聲斷曉岑殘月白 / 血流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奈愁人耳獨聽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 /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에 지새는 달빛만 희고 /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 /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 어찌하여 슬픔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
장릉 앞에 섰다. 한 맺힌 단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재배를 올렸다.
역사는 반전이 있게 마련인가. 사후 241년이 지난 숙종 24년(1698) 마침내 단종은 복위되고 능호(陵號)도 장릉으로 추복되었다. 임금의 묘는 한양 백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지만 단종능은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며, 낮은 구릉이 아닌 높은 곳에 모셔져 있는 유일한 묘라고 했다. 허나 이제 단종능 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능이 또 어디에 있는가.
경내로 내려와 단종을 위해 목숨 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셔놓은 장판옥, 엄홍도의 충절을 기리는 장려각에 들렀다. 단종제 준비에 모두들 바쁘다. 이 행사는 영월군민들이 1967년부터 실시하고 있는 전통 역사축제로 올해 43회째다.
단종 임금께 절을 올렸으니, 목적지 평창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평창 31킬로 표지판이 보인다. 길 양옆으로 노송들이 기품을 뽐내고 있다. 언덕을 거의 오르자 ‘소나기재’ 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단종 승하 후 조정 대신들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 지역에 도착 할 때마다 소나기가 내리므로, 사람들은 단종의 원혼이 소나기를 뿌렸다고 하여 전설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소나기재 마루에 ‘충절의 고장 영월’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단종 없인 영월을 말할 수 없겠다. 마루에서 동쪽으로 백여 미터 산길을 가면 ‘선돌’이 나온다. 층암절벽과 푸른 물이 어울려 서강을 한 폭의 동양화로 연상케 하는 기암괴석 비경이다.
이 언덕을 경계로 영월읍과 북면이 갈린다. 북면 쪽으로 내려가면서 ‘두목마을’어귀를 지난다. 두목이 살았음직한 산중이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이용하여 만든 영월곤충박물관에 들렀다. 영월군이 박물관 특구로 지정됐다는, 15개 박물관이 있다는 군청 최선진님의 얘기가 떠오른다. 시와 동강이 흐르는 고을, 한반도를 쏙 빼닮은 선암마을이 있는, 단종의 한과 넋이 서려 있는 “영월”. 다시 오고 싶다.
영월 3거리. 제천과 평창 갈림길이다. 평창을 향해, 바람에 떠밀려 걷는다. 길가 옥수수 모종이 바람 따라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한다. 보리밭은 바람에 누워버렸다. 송어양식장 입구. ‘KBS. MBC에서 방영된 맛 집’이라는 선전문이 크게 보인다. 올라오면서 비슷한 맛집 선전을 여럿 보았다.
문곡 3거리 가게에서 비비빅을 먹으며 잠깐 쉬었다. 오른쪽은 정선 가는 길이다. 북면 원동리 앞길에서, 서울서 내려온 이상엽, 김정희 부부를 만났다. 국토종단 기사를 보고 함께 걷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온 분들이다. 평창읍까지 18킬로 남았다.
기암괴석과 강물이 어우러진 영월의 모습. 자연이 잘 보존돼 있는 손꼽히는 지역 중 하나이다.
어린 나이에 비명에 간 단종의 묘. 5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역사는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한국일보 국토종단 기사를 보고 서울에서 내려온 이상엽씨. 남은 여정의 좋은 말동무가 생겼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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