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탁에 앉았지만 밥맛이 없어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이층으로 올라왔다. 개운하게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성 싶지 않다. 뜰로 난 창으로 내려다보니 언제나처럼 드라이브웨이를 지키고 있는 1992년생 빨간 웨건이 오늘따라 더욱 기운 없는 모습으로 엎드려 있다.
막내를 낳자마자 처음으로 가져본 새 차는 한밤중에도 나가 운전석에 앉아볼 만큼 흥분스러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차에 아이들 셋을 조롱조롱 싣고 다니던 때가 살아온 날들 중 가장 행복했었던 때였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이들 위주로 선택한 차는 문턱이 낮아 좋았고 장난감 같은 빨간 색깔은 좀 생뚱맞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니 좋았다. 막내만 아기시트에 실어주면 나머지 두 아이는 알아서 기어올라 벨트까지 매고 출발을 기다리던 모습, 가운데 타고 있는 동생이 울면 “애기야, 애기야, 우유 주까? 까까 주까?” 형과 누나가 달래주면 다리를 흔들며 행복해 하던 막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보채던 아이들이 잠들면 차는 무릎을 내어주듯 뒷자리를 눕혀 간이 침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입학하고 악기를 배우러 다니고 도서관을 다닐 때는 하루에 열번도 넘게 시동을 걸었다 풀었다를 반복해야 했다. 차고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던 뉴욕의 오래된 집을 배경으로 서있던 빨간 웨건은 우리 집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차가 서있으면 들어와 차 한잔을 나누고 갔고 우리 집 풍경에서 빨간 웨건이 빠지면 식구들의 부재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꽁무니에 붙어 있는 짐칸에는 장난감과 아기 담요같은 게 오랫동안 실리다가 그 짐들 대신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악기가 실리면서 아이들이 커갔다. 그리고 최근 몇 년 간은 그 짐칸에 무거운 세탁물이 자주 실리면서 주인의 사업까지 돕는 역할을 했다.
우리 가족과 삶을 같이 한 차는 뉴욕과 이곳 워싱턴에서 반평생씩을 살고 내일이면 우리 곁을 떠나게 된다. 그간 쿨럭 거리고 탈탈거리고 쌕쌕, 해소기침도 하며 잔병치레가 심했었다. 급기야 차는 한쪽 눈이 빠져 테이프로 안대를 댔고 군데군데 그 햇빛에 찬란히 빛나던 빨간 빛을 잃어버리고 버짐처럼 등껍질이 벗어지기 시작했다. 고급스런 가죽냄새를 풍기던 시트는 그 옛날 우리 할머니 발뒷굼치처럼 갈가리 터져 품위를 잃은 지 오래이고 히터도 에어컨도 안 들어 온 지 두 해가 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나이를 기억하기 싫다는 듯 마일리지 계기판이 20만 마일 부근에서 정지해 버린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수리비를 들일 때마다 이별을 상상해보기도 했지만 고개를 흔들며 지켜온 차를 배신하게 된 동기는 연방정부에서 내놓은 보조금 때문이다. 거저 줘도 안가져 갈 차인데 4500불씩이나 보조를 해준다니 남편은 새 차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조그만 가전제품을 살 때도 꼭 참견하는 내가 내 몫의 새차를 구입하는 일인데도 수수방관인 이유는 떠나보내는 차에 대한 나의 마지막 예우의 차원같은 것이리라.
쉬이 잠이 들 성 싶지 않아 남편 몰래 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의 차까지 생긴 이후로는 눈 오는 날도 비오는 날도 차고에는 얼씬도 못해본 차가 늙은 수문장처럼 집 앞을 지키고 있다. 차문을 여니 나처럼 잠들지 못했던 기색이 역력한 차가 나를 반긴다. 시동을 켜니 퇴근길에 들었던 음악이 흘러나오고 아직도 식지 않은 한여름의 열기가 뜨듯하게 시트에 남아 있다가 허리로 전해져 온다. 밤공기를 들여 놓으려 차창을 여니 숲에서 날아온 알싸한 숲 내음이 유리창 안으로 가득 들어오고 오랫 만에 올려다본 하늘엔 별도 몇 개 떠있다. 향방 없이, 천천히 밤길을 달리며 차와 보낸 여러 추억을 별을 세듯 하나씩 떠올려본다.
세 아이들 뒤치닥거리 하는 것보다 운전하는 게 수월해 서로 운전석을 차지하겠다고 남편과 벌이던 운전석쟁탈전, 부부싸움을 하고 차고로 내려가 차에 앉아 쿨쩍거리던 일, 이유 없이 사는 게 팍팍하게 느껴지면 아이들이 잠든 새 혼자서 밤드라이브를 한 적도 있었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내어주던 차는 바하나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해 주며 나를 다시 편안한 일상으로 돌려놓아 주곤 했다. 뉴욕생활을 정리하고 이사 오기 전날 밤, 짐이 잔뜩 실려 있는 차를 몰아 혼자 찾아간 허드슨 강변에서 나와 같이 긴 생각에 잠겨주던 차는 돌아오는 길에 더욱 환한 불빛을 비춰주며 등을 툭툭 치듯 나를 격려하기도 했다. 새로운 도시로의 이주에 동행한 차가 주는 위로는 매우 컸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스러운 풍경 속에 덩달아 주눅이 들어 서있던 차는 가족의 일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차문을 당기고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각자의 자리에 앉고 시동을 켜면 똑같은 엔진소음을 내는 차가 주던 위안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더 이상 늙은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차와 동갑내기인 막내가 운전면허를 땄고 슬쩍 웨건의 키를 건네 보았지만 누가 이런 차를 타냐며 퇴박 놓는 소리를 분명 내 늙은 차도 듣고 섭섭했을 것이다. 먼 훗날 추억 속의 사진첩이라도 펴본다면 놈들의 어린 시절 사진마다의 뒷 배경에 서있는 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유년시절을 싣고 다녔던 빨간 웨건을 엄마가 왜 그렇게 놓지 못하고 사랑했는지 그때쯤은 이해하게 되리라. 하여 그들도 한가지쯤은 낡고 오래된 것을 보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정서를 뒤늦게나마 터득할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밀회처럼 밤드라이브를 마치고 유리창을 올린다. 가끔 말을 듣지 않아 한겨울에는 칼바람과 눈송이를 들여 놓으며 달렸던 적도 있는 차창 한 쪽까지도 스르륵 군말 없이 올라가고 틀어놓았던 음악은 이별을 마무리하듯 마지막 장을 연주하고 있다. 드라이브웨이에서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차에 가지고 다니던 소품들을 정리한다. 17년을 달려주고 마지막으로 정부보조금까지 손에 쥐어주고 떠나는 차는 심장인 엔진이 먼저 해체되고 압축기에 사정없이 눌려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차문을 잠그고 돌아서 현관 안으로 들어오며 오래된 연인과 헤어지듯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써본다. 다시 잠자리에 누웠지만 처음 새 차를 들여오던 날처럼 잠은 쉽사리 들지 않고 생각의 발길은 한밤을 돌아 육신의 반이 고장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신 친정어머니에 머문다. 내일이면 내 곁을 떠날 낡은 차와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 친정어머니…. 두 개의 이별 이정표가 서있는 밤, 잠은 천리만리로 달아나고 숨어 있던 추억의 잔해만이 별처럼 총총히 내 가슴에 내려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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