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버섯과도 같다. 나무통에서 쑤욱 올라오기도 하고 땅속에서 뻘쭘하게 나와 있기도 하는 버섯. 기억은 그렇게 일상에서 불현듯 내 사고를 뚫고 고개를 내민다.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애완견 스토어에 삐죽삐죽 들어섰다. 철창이 칸칸이 나눠진 곳에 흰눈처럼 털이소복하게 쌓인 놈들이 서로 엉켜 꼬물거리기도 하고, 올리브 오일을 발라 놓은 듯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놈이 좁은 공간에서 설쳐대고 있기도 했다. 나와 아이들을 보자 까만 루비를 박아 놓은 듯한 눈망울로 자기를 선택해 달라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난 주춤거리고만 있었다. 왠지 그 눈망울을 대하면 애써 접고 있던 기억이 버섯처럼 쑤욱 올라와 오금을 저리게 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열 살쯤 되던 해에 난 달리기 선수로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곧 다가올 학교 운동회 때 당당히 동네 선수로 뽑혔기 때문이다. 그날도 다른 후보 선수들과 함께 연습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데,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건너 집에서 동네 사람들이 왁자하게 아랫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조심하라고 소리치는 동네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 하고 아랫집 대문을 들어섰다. 황소만한 누렁이가 집 모퉁이에서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몹시 지치고 화난 표정이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그 누렁이는 마치 화풀이 할 대상을 만났다는 듯 크엉 거리며 우리를 향해 질주해 왔다. 나와 친구들은 혼비백산 마이크로 웨이브 오븐에서 튀겨지는 팝콘처럼 투다닥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 누렁이는 나를 집중적으로 추격해왔다. 난 동네를 대표하는 선수답게 거품까지 물어가며 혼신을 다했으나 누렁이의 송곳이가 단숨에 내 종아리를 찍어 버렸다. 나의 괴성에 희열을 느끼는 눈빛으로 누렁이는 뜯은 살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그 사건 이후, 난 똥개든 애완견이든 사이즈에 상관없이 그네들과 눈만 마주쳐도 소름이 소르르 돋았다. 그런 나에게도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건 순전히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키 176 cm에 72 kg의 체중으로 준수한 용모에 혈색도 붉으족족하니 좋았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2, 3월만 되면 죽을 듯이 2주 정도 병치레를 연례적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9 년 전, 남편은 또다시 그 연례 행사를 치르고 있었다. 결혼 전부터 시어머니께서 해 주시던 방식으로 전기 담요에 이불을 몇 겹 깔고 두툼한 옷을 입고, 머리에 바람 들까봐 고깔모자까지 쓰고 또다시 몇 겹의 이불을 뒤집어썼는데 이상하리 만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남편은 약장에 있는 약을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겨 먹었지만 병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앰뷸런스, 소방차 그리고 경찰까지 동원 되어 남편은 응급실로 실려 갔다. 남편은 두어 번 더 응급실로 실려 가길 거듭하다가 결국 중환자실까지 차지하고 누워버렸다. 이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싶었던지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그런 와중에 아홉 살배기 아들은 어느새 친구 집에 놀러가고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남편은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병석을 털고 일어난 아빠를 위해 아이들은 Father’s Day 선물로 아빠가 좋아하는 강아지 한 마리를 사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 결정을 듣는 순간 누렁이에 대한 나의 기억이 송이버섯처럼 툭 하고 삐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이들의 손에 끌려 애완견 스토어에 들어서고 말았다.
난 아이들이 후보 강아지를 나에게 들이밀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면서도 태연한 척 애를 썼다. 그렇듯 어정쩡한 모습으로 아이들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데, 철망 구석에서 홀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옅은 브라운 컬러의 치와와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점원에게 그 치와와를 지목했다. 그 치와와는 그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고 했다. 함께 방을 쓰는 친구들이 할켰는지 눈에 상처가 나서 눈곱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동안 주눅이 들어서였을까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계속 바들바들 떨었다. 우리는 그 가여운 치와와와 함께 상처를 치료해 줄 연고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치와와와 남편은 단박에 친해졌다. 남편은 이름을 ‘치코’라고 지어줬다. 그날부터 치코는 우리의 막내딸이 되었다. 온 가족의 사랑에 취해 도도해져만 갔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고고한 신분이었다고 믿어 버린 치코. 짜리몽땅한 몸매에 연신 눈곱을 달고 다니는 앞집 멍멍이와는 수준이 맞지 않아 상대를 못하겠다고 고개를 홱 돌려 버리기도 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남편이 치코와 함께 있을 때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여기저기 흘려 놓은 똥도 예쁘다고 어린아이처럼 낄낄거린다.
치코가 새 식구로 들어온 이후 남편의 고깔모 연례 행사는 사라지고 없다. 아이들의 사춘기도 치코가 훔쳐버렸다. 그리고 버섯과도 같이 여기저기서 툭툭 올라오는 누렁이에 대한 나의 기억도 치코가 스팸 처리해 버렸다. 치코는 우리 가족의 주치의다. 그 주치의의 처방전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이성애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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