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첫눈에도 방금 병풍 속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같이 지독하게 잘 생긴 남자였다. 어머나! 입구 옆의 비어있는 자리에 털석 앉고 보니 그런 남자가 바로 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여자는 그 얼굴을 애써 못본척하며 남자 머리 위에 붙어 있는 광고판에 눈을 주었다. 저 남자는 지금까지 의기양양하게 자기를 보고 잘 생겼다고 까무러치는 소리를 신물이 나도록 수없이 듣고 또 들었겠지. 나까지 그런 눈치를 줄 필요는 없다.
자신과 똑같이 지금 이시간 차도 없이 밤 12시 15분 마지막 바트를 타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못될꺼야.
광고는 당신의 멋진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현란한 문구와 함께 인터넷 닷캄 어쩌고 하는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멋지고 즐거운 밤은 도대체 어떤걸까? 촛불이 켜진 아늑하고 야한 밀실에서 서로 주고받는 은밀한 적포도주.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한 그림도 상상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동안 자기가 노래부르던 빠에서 오늘 해고 당하고 돌아가는 더러운 기분이라 달콤한 핑크빛 무드가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지? 뉴욕이나 LA로 갈까?
목에 꼿꼿히 힘을 주고 상대방을 무시하듯이 광고판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여자는 그러나 직장을 놓친 구멍뚫린 한줄기 외로움 때문일까. 여자는 불현듯 앞의 남자를 향해 무언가 도란도란 속삭이듯이 얘기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자기가 한국에서 한때 이름 날리던 가수였다고 말하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고로 잘생긴 남자는 자기 인물값 하느라 가슴앓이를 많이 시키니 조심하라는 말도 있지만 여자는 이상하게 지금 그 남자에게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하고 넌짓히 먼저 말을 붙여 호감을 얻고 싶었다. 얼굴은 동양인이지만 한국 사람은 분명 아니고 펑퍼짐하면서 수려한 미모가 중국인 같지도 않다.
자기도 그동안 연예계 물을 먹고 안가본데 없이 돌아 다녔지만 저렇게 눈이 번쩍뜨일 만큼 옵파! 하고 그냥 쓰러지고 싶은 얼굴은 여지껏 한번도 보지 못했다. 정말 기가막히게 잘 생겼다. 여자들은 이상하다. 저 정도 얼굴이면 그동안 많은 여자들을 스쳤을테고 상대방이 설혹 이름난 한량이고 그 사람손에 걸리면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들의 알수없는 마력에 빠져 그냥 걸려든다.
저 남자는 그걸 알까. 여자들이 가끔 강간 당하고 싶을때가 있는 법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의학적인 어떤 공식 표현으로 되어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혼자 살고 있는 자기는 자주 그런 기분을 느낀다.
가수가 힛트곡이 떨어지면 밤무대를 거치면서 때로 극단에 끼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십수년을 살면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유로 가정의 문제가 뒤따른다. 인기있는 젊은 아이는 주간지 기사꺼리도 되지만 중년을 넘기고 옛날 힛트곡 한두개로 겨우 버티는 퇴물가수는 사람들이 모르면 모르는대로 그냥 넘어간다. 여자는 그런축에 끼이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얼굴 옛날 그대로예요 하고 장수무대 프로그램에 머리를 싸매고 출연하면서 자기 얼굴을 알렸다. 철저하게 비밀을 챙기는 것이 일급이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꼽싸리 끼여 추석 위문공연 멤버로 미국에 온 여자는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버티기로 했다.
여자는 지금 자기 영어가 조금만 유창하다면 슬쩍 앞의 남자를 향해 농담이라도 던지며 말을 붙이겠지만 그러면 남자는 내리면서 해브유 나이스 나잇! 하고 꼭 그런 말을 할것이다. 거짓말 같이 너무 잘생긴 사람에게 그런 말을 직접 들어보는 비밀스러운 감동이 느닷없이 그리운 것도 자기가 지금 너무 외로워서 그렇다고 여자는 스스로 위안했다. 그러나 자기는 농담을 던질 정도의 영어 수준이 못되고 그것이 또 기분 나쁘고 약간 슬프게 했다. 슬픈것은 낯선 나라 미국에서 직장 떨어진 만큼 기막힌 것이 또 있으랴.
여자는 자기의 힛트곡과 흘러간 옛날노래 몇곡이 주무기였다. 특히 비내리는 호남선에서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드란다는 여자가 절대 자신하고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였다. 그 노래 마지막 구절은 아무도 흉내못내는 자기만의 독특한 창법으로 불러 언제나 앵콜송을 받는 곡이다.
그런데 주인마담이 난데없이 노래 끝나면 테이블에 가서 손님을 받으라는 것이다. 옛날 월남전이 한창일 때 거기 위문공연 갔던 민요가수가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가아랴 하고 밋진 푸른군복입은 사나이들과 몇번 어울렸다가 소문이 바람타고 건너와서 슬그머니 정식무대 생활을 접은적이 있다. 가수가 어느빠에서 손님잔에 술을 따랐다 하면 그것으로 가수 생명이 끝장난다는 사실을 주인마담은 전연 모르는 모양이다. 주인마담은 너 내말 안들으면 당장 찔러버릴꺼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민국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 전화걸 것 없이 싫다고 하면 곧장 달려갈 것 같이 기세등등했다. 지랄한다 너 손쓰기 전에 내가 당장 나가면 되지. 그리고 두말하지 않고 빠를 뛰쳐나와 여자는 마지막 바트를 탔다.
여자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서 한순간 자기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자기가 이렇게 꽃놀이 가듯이 차가 가는 대로 그냥 앉아있을 처지가 아니란 것을 문득 깨달았다.
이시간 바트 승객으로 전연 어울리지 않는 저 남자의 정체가 혹시?! 웬지 선그래스를 끼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부터 수상하다. 그래 찔렀는지 모른다. 자기가 차를 타는 시간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는가.
그때 갑자기 안내방송이 귀에 들어왔다. 여자는 이내 자기가 내릴 차례인 것을 알았다. 자기가 내리면 저 남자가 뒤따라 내리면서 같이 좀 가실까요. 그러면서 이민국 직원이라고 하겠지. 상대가 그런줄도 모르고 마음문을 열어주려고 했다니. 나도 정말 미친년이야.
바트가 스르르 속력을 줄이더니 덜컥 역안에 멈추어섰다. 여자는 토낄 궁리를 하고 겁이나서 눈치채이지 않게 가만히 앉아있다가 문이 열리기 바쁘게 벌떡 일어나서 잽싸게 후다닥 밖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등뒤에서 간이 떨어질만큼 놀랍게도 자기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뒤돌아보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 남자인 것을 알고 너무 놀란 나머지 돼지 멱따듯이 속으로 더운 콧김만 가쁘게 내쉬었다. 이제 끝장이구나.
남자가 여자를 향해 문앞에서 또렷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바로 한국 말이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네요. 꼭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즐거운 밤이 되시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덜컥 문이 닫히면서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미끄러지는 차안에서 끼고있던 선그래스를 이마위로 올리고 연신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저 얼굴?! 어마마 한국 사람이었구나. 진작에 알았드라면. 선그래스에 가려졌던 얼굴을 직접보니 미안하게도 진짜 옵파! 하고 쓰러질만큼 그렇게 잘 생긴 미남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남자가 나를 보고 즐거운 밤이 되기를 바란다고? 실망스러운 것보다 여자는 조금전에 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던 열정이 고무 풍선처럼 떠올라 저만치 빨간불을 달고 멀어져가는 바트 뒷꽁무니를 보면서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드란다는 자기 18번이 속절없이 자꾸 떠올랐다.
즐겁다. 그래 세상 사람 아무도 몰라주는 불체자 신분에 나 혼자만 즐거운 밤이다. 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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