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면/ 나는 밤 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러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 서 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고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우리의 민족시인 심훈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고 우리 민족이 하나같이 열망하던 그 날, 그 해방의 날이 왔다. 1945년 8월15일 정오,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일본이 ‘천황’이라고 받들던 자가 라디오 방송으로 선언했다. 이 항복 선언은 우리 겨레에게는 광복을 알리는 전령(傳令), 바로 그 것이었다.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대장정은 유례없는 일본 군국주의의 압제와 폭압에의 무한 투쟁이었다. 빼앗긴 자주권을 되찾아 상처 입은 민족의 자부심을 치유하고 민족의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그 치열한 투쟁은 우리 민족이 최초로 다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운 성전(聖戰)이었다. 따라서 이 날 해방을 맞아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우리 동포들의 환희와 감격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러나 이 해방의 기쁨은 오래 가지 못 했다. 일제는 물러갔으나, 연합군은 해방군이 아닌 또 다른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진주해 왔다. 북위 38선 이북은 소련군, 이남은 미군이었다. 이 해 9월8일 미군이 남한 땅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발표된 미군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문 제1호’는 “본관 지휘하의 군대는 38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하였다”라고 선포했다. 즉 당시 많은 동포들이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미군은 실상 ‘점령군’이었다.
그리고 이 점령은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일제의 폭압 못지않은, 아니 보다 더 장구한 민족사의 비극을 연출한 민족분단의 시작이었다. 한국전쟁의 민족상잔과 뒤이은 남북의 첨예한 대결은 인류사에 그 유례가 없는 외세에 의한 단일민족 국가의 최장기 분단체제로 고착화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연합군에 항복한 일본의 재건과 이에 기여한 미국과의 밀착외교에 편승한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러나 해방 후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우리가 무엇보다 반성해야 할 점은 해방 후 미군정(美軍政)의 지지로 정권을 쥔 세력들이 일제 식민지 시절 일제에 아부하여 일제의 엄혹한 위력을 배경으로 호위호가(狐假虎威)하며 동포를 괴롭히고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분자들을 비롯한 일제의 잔재를 과감히 청산하지 못 하고, 민족정의를 정립하지 못한 실책이다. 즉 우리 자신들의 역사청산 의지의 결핍이 지금까지 헤어나지 못 하고 있는 민족사의 파행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이차대전 중 독일에 점령되었던 프랑스는, 그 점령기간이 4년여에 불과했지만, 해방 후 친독(親獨)을 철저히 척결함으로서 ‘프랑스의 가치’를 확립했다. 연합군에 앞서 파리에 개선(凱旋)한 샤를르 드골 장군은 나치독일 점령 치하에서 점령군의 하수인으로 동족을 괴롭힌 반민족범들을 색출, 7백40 명을 사형시키고, 2천7백 명을 종신 강제노동, 1만6백 명을 유기 강제노동형, 2천 여 명은 금고형, 2만2천 명을 유기 징역에 처했고, 3천5백 명은 공민권을 박탈했다. 불의에 대한 이처럼 철저한 응징이 프랑스의 프라이드를 되살리고, ‘프랑스의 정의’를 세워 이 같은 자주적 결의를 바탕으로 진정한 국민적 대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친일파가 오히려 득세하여, 그 여파로 오늘까지도 정의는 불의에 밀리고, 불법, 편법과 부정이 득세하고 있다. 오늘 한국의 집권층을 비롯하여 언론과 정치계, 재벌을 비롯한 경제계와 심지어는 학계와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친일 잔재들이 소위 ‘우익’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회 전반이 깊이 포진(布陳)하여, 민족 화해운동을 친북, 좌파라는 허무맹랑한 용어를 구사, 매도하면서 일본의 한반도 분단체제 고착화 세력 사주의 충견(忠犬) 노릇을 하고 있다.
바로 이들의 영향력 때문에 상당한 비율의 미주 한인들이 민족화해 문제는 물론 일제의 정신대 문제나 독도 영유권 주장 등에 대해 무관심을 넘어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엊그제 워싱턴 주재 일보 대사관 앞에서 가진 일제 성노예 규탄대회에 참가한 인원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정말 아쉽기 짝이 없었다. 워싱턴 주변에 2십5만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 가장 아픈 상처를, 그리고 일제의 비열한 만행을 항의하는 시위에 모인 한인수가 이토록 왜소할 수 있을까? 한인사회의 그 수많은 단체, 특히 종교 단체들의 좌시(坐視)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외세로부터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불의에 대해 이를 시정하기 위해 협력하여 투쟁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항의라도 해 보려는 의지가 이렇게도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미치면서 그 시위 현장에서 잠시 좌절감에 빠졌던 순간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비록 자본주의의 종주국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양심을 지배하는 이성이 있고 이성의 명령에 따를 때 비로소 인격체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듯, 우리 한민족의 자부심을 지키려는 결의를 보이는 것도 개인의 생존권이상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우리 동포들 일부가 이 날 하루 가계 문을 닫고 시위에 동참한 숫자가 2, 3백 명에만 미쳤다면 아마 일본 정계가 발칵 뒤집히고 일본 언론이 자정의 목소리를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 64주년을 맞아 미주의 동포들이 모두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존을 지키는 새 역사의 지평을 열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양식을 되찾게 되기를 바란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 날,” 그 광복을 맞은 우리 어버이들의 감격을 되시기면서 오늘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분단의 쇠사슬을 끓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진정한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는 길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해방, 진정한 광복은 바로 통일이다.
(Editor.US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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