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 집 줄이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로 그럴 일이 아니에요. 손바닥만 한 집에서 부부가 하루 종일 마주 보고 있으려면 속에서 불이 나요. 갑갑해서 못 견뎌요”
몇 달 전 어느 댁을 방문했을 때 60대 후반의 여주인이 말했다. 은퇴 후 부부가 집에 있게 되면서 바늘에 실 가듯 붙어사는 노년의 생활을 말하는 것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함께 지내려면 공간이 좀 넓어야 숨통이 트인다고 그 부인은 말했다. 성품이 온화한 그 남편은 옆에서 웃고만 있었지만 ‘갑갑하다’는 부인의 말에 아마도 서운했을 것이다.
60대 부부들을 만나보면 대개 아내는 갑갑해 하고 남편은 섭섭해 한다. 평생 남편이 일이다, 출장이다, 친구다 하며 밖으로만 돌던, 그래서 아내에게 남편은 하숙생이나 다름없던 부부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 뚜렷한 것 같다.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이제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한 지인이 있다. 그분이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들고 보니 여성들의 마음을 좀 알겠어요. 젊어서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아내가 뭘 원하는지 신경도 못 썼지요. 여성들에게는 가족이나 관계가 제일 중요한데, 남성들은 야망이나 성취가 우선이니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부부가 서로 다른 지향점을 향해 분주하게 살다가 꼼짝없이 마주앉게 되는 계기가 은퇴다. 수십년을 일, 그리고 일로 맺어진 인간관계들을 축으로 살던 남편들은 은퇴를 하고 나면 갑자기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게 된다. 게다가 평생 아내에게 무심했던 데 대한 자책도 있고, 여성호르몬 증가로 감상적이 되다보니 남편들은 자꾸 아내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90년대 일본에서는 ‘젖은 낙엽’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황혼이혼이 갑자기 늘던 그 즈음 아내들이 은퇴한 남편을 두고 붙인 별명이다. 물에 젖어 딱 달라붙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24시간 붙어 지내는 남편을 말한다. 요즘 이곳에서도 그런 남편들이 보인다. 한 주부의 말이다.
“남자가 나이가 드니 의존심이 많아져요. TV를 봐도 꼭 옆에서 같이 보자고 하고, 집안에서도 내가 조금만 안보이면 찾아요”
어쩌다 외출을 하면 남편이 어찌나 자주 전화를 하는 지 친구들도 마음 놓고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이 나이에 웬 시집살이!” 하며 아내들은 갑갑해 한다.
젊은 시절, 어쩌다 일찍 귀가하면 그렇게 반기던 아내, 주말에 집에서 지내면 그렇게 좋아하던 아내는 어디 갔을까 - 남편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생물이 외계의 영향에 적응하며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을 진화라고 한다면 아내들은 그동안 ‘진화’를 한 것이다.
유전체 분석기술이 발달하면서 생물의 진화역사가 점점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척추동물이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로 분류되었지만 현대 유전체 정보에 기초한 분자 계통도로 보면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는 모두 어류의 한 계열이라는 것이다. 공중을 나는 새가 수십억년 전에는 물고기였다는 말이다.
이민 1세로 60대 전후 세대는 집에서 남편 얼굴을 별로 못 보며 산 아내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은 밖으로 나돌수록 유능하고, 집안일은, 직장이 있건 없건 오로지 아내의 몫이던 세대이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은 ‘하숙생’이 되고, 그런 남편에 대한 서운함과 원망으로 속 끓이던 아내는 결국 ‘진화’를 시작한다. 자녀가 태어나면서 자녀를 축으로 삶을 재정비하고, 자녀가 성장하고 나면 친구들과의 교유에서 삶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남편은 옛날 생각하고 물가를 서성이는데 아내는 이미 새가 되어 공중을 훨훨 날아다니는 격이다.
은퇴 후 부부사이가 좋으려면 시간의 안배가 중요하다.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과 따로 하는 시간의 균형이다. 그러려면 남성이건 여성이건 젊어서부터 직업과는 무관한 친구들, 몰입할 수 있는 취미를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서정주, 국화 옆에서> ‘누님’처럼 은퇴한 부부가 마주 앉는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던 온갖 번잡한 요소들이 다 사라진 이때가 어쩌면 진정으로 서로를 알게 되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평생 같이 산 이 여자(남자)가 “사실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고.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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