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여름 전 세계를 엄습한 예기치 못한 쓰나미급 경기침체 앞에서 사람들은 무기력을 느꼈다. 무섭게 밀어 닥치는 거대한 파고에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이 휩쓸려 갔다. 평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재산이 순식간에 반 토막 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경제가 무서운 속도로 악화되는 가운데서도 상황을 재빨리 읽고 발 빠르게 움직여 피해와 손실을 최소화 한 소수는 있었다. 이들은 주식시장이 붕괴조짐을 보이자마자 투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는 민첩함을 보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어, 어” 하면서 그냥 지켜만 보다가 소중한 재산을 날려 버렸다.
사실 투자 포트폴리오를 옮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번거로운 일도 아니다. 전화 한 통 하거나 서류 한 장 작성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런데도 힘들게 번 돈을 주식시장에 쏟아 부었던 수많은 투자가들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상황에 몸을 맡겼다가 감당하기 힘든 손실을 떠안았다. 머릿속으로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주식시장이 다시 불붙으면서 일부 손실이 회복되긴 했지만 ‘노 액션’의 여파는 지속되고 있다.
손 놓고 가만히 있으면 손해인줄 알면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인간들의 보편적 성향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올 여름휴가 때 읽기 위해 가지고 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책 ‘넛지’(Nudge)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좋은 사례가 소개돼 있다.
미국 대학교수들의 은퇴연금 프로그램을 조사해 보니 대부분 교수들이 평생 동안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결혼 전 자기 어머니를 수혜자로 해 놓았던 교수들이 결혼 후 수혜자를 아내로 바꾼 경우도 거의 없었다. 유·불리를 따져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것 같은 교수들조차 처음 가입할 때 한번 선택한 것은 웬만해서는 바꾸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상유지(status quo) 편향’이라 불리는 속성이다. 인간 행동의 동기를 분석해 명성을 얻고 있는 경제학자로 이 책의 저자이기도 한 리처드 탈러는 이것을 ‘아무려면 어때’ 사고방식이라 표현한다. 이런 일반적인 성향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마케팅에 많은 사람들은 별다른 의식 없이 지갑을 열고 있다.
사람들은 왜 변화는 되도록 회피하고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 드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변화가 일으키는 심리적 불편함 때문이다. 모습이 불분명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현재의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안겨준다.
나쁜 상황과 여건이라 할지라도 일단 여기에 익숙해지면 현재의 상태가 더 편안하다. 변화에 대한 저항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든다. 심지어 승진과 원하던 부서 이동, 좋은 직장으로의 전직 같은 긍정적 변화조차도 일시적으로는 불안감을 안겨 준다.
또 변화가 가지고 올지 모르는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도 한 몫 한다. 현재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것은 기득권을 보호 받지 못 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개혁에 대한 저항은 대개 이런 이유로 생겨난다.
현재 미국사회에서 변화에의 저항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이슈가 바로 의료개혁이다. 10일 발표된 USA투데이/갤럽 여론조사에서 의료개혁에 대해 노년층의 반대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개혁안과 관련해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온갖 루머가 나돌고 있는 것은 개혁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무보험자가 급속히 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의료보험을 갖고 있는 미국인이 다수인 상황에서 의료시스템의 일대 변화는 불확실성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변화의 전도사’임을 자처하는 오바마는 의료개혁안을 제안하면서 “현상유지의 유혹을 벗어나지 않으면 미국의 장래가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의료개혁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있다.
‘개혁’은 가죽을 새롭게 다듬는 것을 뜻한다. 가죽을 무두질 하는 데는 세심함과 인내, 그리고 솜씨가 요구된다.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의료개혁이라는 무두질에 나선 오바마가 솜씨 좋은 장인으로 자리매김 할지, 아니면 서툰 가죽쟁이로 판명 날지는 결국 변화를 불편해 하는 다수의 국민들을 얼마나 잘 설득하고 납득 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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