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찾았다. 메르켈 총리는 나치 정권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고 방명록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인간성은 과거를 책임지는 것에서 싹튼다.”
독일은 과거 인류에 대해 저질렀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거듭하고 있다. 전범들과 부역자들에 대한 엄중한 사법 처리는 물론 피해자들에게 아낌없이 경제적 보상을 해 주고 후세들에게는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힘써 왔다. 이런 모습에서 진정성이 전해진다.
독일에서 공부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가 들려주는 얘기에 따르면 독일의 과거사 청산 노력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다. 전후 독일 지식인들은 2차 대전 중 독일이 보인 야만의 원인을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에서 찾았다. 이런 진단에 따라 사회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집단적인 리추얼을 철저하게 해체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래서 독일 대학에는 졸업식이 없으며 졸업 가운도 사라졌다. 이 같은 리추얼이 권위주의에 다시 불을 붙일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심지어 초등학교의 합창시간까지 없어졌다. 반성이 철저하다 못해 거의 병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독일의 태도와 달리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고 사죄하는데 대단히 인색하다. 연방의회에서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이와 관련한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궁색한 태도를 보였다.
인간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존재다. 인간들의 집합체인 국가 역시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런 실수를 어떤 자세로 청산하느냐 이다. 독일이 보인 것과 같은 진솔한 사죄가 있는 반면 교묘한 수사로 사과와 사죄를 피해가는 기만적 태도도 있다.
사과와 사죄는 상처를 소독하는 행위다. 당장은 쓰라리지만 그래야만 상처가 있던 그곳에서 새살이 돋아날 수 있다. 별 잘못이 없다는 강변으로 덮고 넘어가면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더욱 곪게 된다.
2007년 연방의회의 한국 위안부 사과 결의안을 주도했던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화해를 구하는 데는 시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처럼 아무리 늦은 사과와 사죄라도 침묵과 외면보다는 훨씬 낫다.
지난 주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통과시킨 과거 중국인 차별에 대한 사과 결의안은 그런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결의문이 통과됐다고 해서 중국인들의 일상이 달라질 일은 없지만 이런 사과는 잘못된 과거에 상징적으로 마침표를 찍어 주는 일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지구촌에서는 ‘사과 바이러스’가 급속히 번져왔다. 캐나다와 호주 정부는 과거 원주민들에 대해 저질렀던 만행을 사죄하고 나섰다. 연방의회도 과거 노예제에 대해 흑인들에게 공식 사죄했다. 어두운 과거를 계속 외면해서는 역사의 진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미 지난 1988년 2차대전 중 캠프에 수용됐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사과와 함께 1인당 2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한 바 있다. 이런 과정과 절차를 통해 역사 속의 상처는 치유되고 서서히 아물어 간다.
사과와 사죄는 과오에 대한 성찰이자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이런 행위가 가능하다. 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을 경우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데 머뭇거림이 없는 지도자다. 하바드대 흑인교수 체포사건에 대해 “어리석은 일”이라고 경찰을 비판했다가 사안이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하자 “내가 선택한 어휘가 해당 경찰관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인상을 줬다”며 솔직히 사과했다.
그는 지난 2월 자신이 보건장관으로 지명했던 정치적 대부 탐 대슐이 탈세문제로 낙마하자 “내가 일을 망쳐버렸다”고 즉각 시인하고 나섰다. 비리의 종합백화점이라 할 만한 인사들을 지명해 말썽을 초래하고도 청맹과니처럼 행동하는 어느 나라 대통령과 비교된다.
언론들은 전임 부시와 대비해 오바마의 이런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 부시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대통령이 약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여겼다. 소통의 부재는 바로 이런 태도에서 시작된다. 사과에 인색한 권력자는 겉으로는 강한 것 같아도 속으로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과즉물탄개’(過卽勿憚改)라고 했다. 즉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데 꺼리지 말아야 군자라는 뜻이다. 사과에 인색한 지도자, 사죄를 머뭇대는 국가는 본질적으로 내면이 허약한 존재들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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