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다발 없는 나이 그 졸업식 - 복영미
아카시아 꽃향기 풋풋하게 배어드는 오월이 미국의 졸업시즌이라면, 꽃샘바람에 매화 향기 실려 오는 이월은 한국의 졸업시즌이다.
꽃다발 없는 나이, 나는 그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태평양 바다를 건너 시어머님 홀로 만년을 지냈던 13평 광명시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긴 자주색 끈이 달린 열쇠로 문을 따자 주인을 잃고 쓸쓸하게 엎드려 있던 어머니가 쓰시던 아날로그 살림살이들이 먼지를 떨며 부스스 일어났다. 시차로 끙끙대던 몇 밤 구식 금성 티브이 위의 액자 속 어머니가 “보리차라도 한 잔 낄이 묵고 낼 졸업장에 늦지 말그래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나처럼 웃는다.
기름때 낀 전자오븐 버튼을 꾹 누르니 푸르스름한 불꽃 켜질 듯 말 듯 푸드득거리다 이내 스타박스 커피보다 진한 보리 냄새가 방안 가득하다. 눈을 감으면 경희사이버대학에서 문학수업을 받았던 지난 사년의 필름이 파란하늘에 거꾸로 흐르는 구름처럼 흘러간다.
한 때 한국에서 사장님! 하고 부르면 길 가던 아저씨들이 일제히 돌아보곤 했다는데 요즈음은 시인님! 하고 부르면 길 가던 아줌마들이 일제히 돌아본 데나 우스갯소리 같지만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에서나 모임 같은 데서 나를 보고 시인님하고 부르면 낮이 뜨거웠다. 집 앞 계단에 밤이 깊도록 앉아 있는 날이 많았다.
이 나이에도 사이버대학에서 문학공부를 할 수 있을까? 컴퓨터라고는 겨우 한글 몇 자 치는 초보자 중 왕초보인 내가 어떻게 인터넷으로 진행되는 공부를 할 수 있겠어.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는 동안 2003년 대학 등록기간은 훌쩍 지났다. 그 다음 해 또 놓쳤다. 나이는 점점 하루가 다르게 하오로 기울고 있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갓 출산하여 몸조리하고 있는 아는 새댁에게 밤이고 낮이고 체면불구하고 전화를 걸어 조금 전에 물었던 것 깜빡하곤 다시 또 물어 겨우 등록을 마쳤다. 앞으로 사년 동안 해내야 할 학업에 대해서는 미리 걱정 않기로 했다.
획기적인 인터넷의 발달로 한국 원격대학의 강의를 태평양을 넘어 뉴욕의 안방 컴퓨터 앞에서 희끗희끗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톡톡 토도독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모든 것이 디지털 동영상으로 진행되는 강의는 아날로그에 길들여진 나에게 적응하기 매우 어려운 수업방식이었다. 숙달된 사람이 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작업을 너 댓 시간 때로는 여덟 시간까지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은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면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다리가 휘청거려 책상을 붙잡고 잠시 눈을 감고 진정해야 했다. 거울에 비친 내 꼴은 며칠 새 훌쩍 늙어버린 파파 할멈 같았다. 어느 날부터 왼쪽 어깻죽지가 몹시 당겼다. 왼쪽 팔도 저릿저릿했다. 병원에 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팔을 죽 뻗어 올려보았더니 덜 저리는 듯해서 손님 오셨을 때 옷 걸어두는 옷걸이를 책상 옆에 끌어다 놓고 팔을 걸쳐 스카프로 동여매고 한 손으로 자판기를 두드렸다. 새 학기 첫 중간고사가 끝난 후 병원에서 MRI를 찍어 보았더니 경추 5번, 6번 디스크라 했다.
컴퓨터와 눈높이가 맞지 않는 의자에 앉아 목을 뒤로 바짝 제치고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장시간 화면에 눈을 고정시키고 떠듬떠듬 키보드를 두드렸으니 목인들 눈인들 성할 리 없었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지만 캠퍼스의 낭만도 꿈꾸는 문학도들과의 만남도 없는 차가운 사각의 쇠붙이 앞에서 마른 눈을 껌벅이며 혼자 했던 문학공부는 나에게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사이버대학은 오프라인보다 좀 수월하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학생들 대개가 컴퓨터 세대였다. 그것은 학기가 시작될 때 게시판에 올리는 자기소개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는 흔치 않은 듯했다. 육신과 머리는 따라주지 않는데 아직도 문학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힘든 공부를 계속하느냐 포기하느냐 갈등했다. 갈등이 깊어질 때마다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을 당하고 시를 쓰며 죽어갔던 맑은 영혼의 윤동주 시인을 떠올렸다.
지금도 나는 첫 시험 치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시험 삽 십분 전 점점 조여 오는 긴장감에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현관 밖으로 나갔다. 새 소리만 적막을 깨치는 새벽 양 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하며 쿵쿵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안으로 들어와 냉수를 한 잔 들이켜고 오도카니 앉아 기도했다. 다시 또 현관 밖으로 나갔다. 경직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초등학교 때 배운 보건체조를 순서 없이 했다.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새벽 달 아래 보건체조 하는 살짝 돈 늙은이라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겠지. 말끔히 정리한 책상 위에 시험도중 생길지도 모르는 컴퓨터 오류에 대비해서 국제전화 카드, 전화기. 학교의 수강지원센터 번호, 냉수 한 컵을 가지런히 놓았다. 심호흡을 하고 시험에 임했다. 컴퓨터에 서툰 내가 시험 도중 혹 마우스를 잘 못 건드려 원인 모르게 화면의 시험문제가 사라지지 않을까 조바심했다. 안타깝게 흐르는 시간을 곁눈으로 확인하며 작성한 답안이 휙 날아가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떨리는 손으로 클릭클릭 답안지를 체크했다. “시험 종료 시간이 일 분 남았습니다. 종료시간 까지 답안을 제출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답안지가 제출됩니다”라는 경고의 창이 떴다. 시험 종료 십초 정도 남았을 때 답안지 제출을 클릭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답안지가 정상으로 제출되었습니다” 휴우- 시험 종료가 되자마자 학과의 자유게시판으로 들어가 보았다. “시험이 넘 어려웠어요. ㅠㅠ, 시간이 모자라 문제를 다 풀지 못했어요. 나만 그런감? 흑흑, 뉴욕에서 시험 보셨다구요. 과연 글로벌 시대를 실감할 수 있군요. 세 번째 문제 답이 뭐죠? 저도 그게 알쏭달쏭 했는데 좌간 아직 치러야 할 셤이 몇 개나 남았으니 열공합시당” 초를 다투어 올라오는 시험을 치른 학생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게시판의 글을 읽는 것은 온라인 수강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혹자는 “집에서 보는 시험 맘대로 커닝할 수 있겠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검색창에 마우스를 클릭하지 못하도록 마우스 움직임이 제한된 면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시뻘건 경고 불이 켜지면서 “경고합니다! 학우님은 마우스를 제한된 선 밖으로 이동하였으므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여 감점을 받게 됩니다”라는 창이 뜬다. 실수로 마우스를 선 밖으로 움직였다가 기겁을 하기도 했다. 곧 이어 다른 과목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긴장했던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했다.
전공이 문예창작인 만큼 교수님들이 몇 월 며칠까지 올리라고 제시하는 방대한 양의 리포트 작성은 이미 용량이 부족한 머릿속을 뒤죽박죽 흔들어놓았다. 얼굴색도 점점 병자처럼 누렇게 변해갔다. 리포트 작성을 하라는 공지가 게시판에 뜨면 참고도서부터 먼저 인터넷서점에서 오더를 했다. 책이 제대로 도착해도 한국에 있는 학우들보다는 사오일 또는 일주일 정도가 늦어 그만큼 리포트를 올리는 마감날짜까지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필요한 서적이 서점에 있을 때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간혹 고객님께서 구하시는 책이 절판되었습니다라고 할 때는 얼마나 난감한지 한국의 교보문고, 영풍문고, 학교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다. 어떤 친절한 학우는 책 내용을 게시판에 몽땅 올려주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리포트 작성 기간 때는 어쩔 수 없이 창밖이 훤해질 때까지 참고서적을 읽어야 했다. 책 속에는 내가 문학에 대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높고 넓고 풍부한 지식이 가득했다. 그것을 얼마나 나의 자양분으로 흡수하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었다. 그리 건강하지 못했던 체력은 고갈되어 가는 듯 했지만 정신만은 풍요로웠다. 무지에서 배움으로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기쁨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끝없이 학문에 탐구하며 팔십대가 되어서도 박사학위를 받는 노인들의 학구열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끔 주위의 사람들은 그 나이에 건강이나 챙기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지 뭐 그리 아등바등 공부를 해쌓느냐고 안쓰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는 황혼에 접어든 나이에 쓸데없이 삶에 대해 짐승같이 들끓는 열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쓸쓸해지곤 했다.
언제나 중간고사 기간인 4월이면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에 목련이 흐드러지게 핀다. 잎이 돋기 전 마른 가지에 탐스러운 꽃숭어리 꽃샘바람을 타고 숨 자지러지도록 나부끼는 자주색 꽃잎의 지향 없는 슬픔, 밤이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해가 나면 새롭게 태어나는 튤립, 자신의 모습에 넋을 빼앗긴 수선화, 짧은 생을 빛나게 살다 가려는 듯 다투어 피고 지는 모습을 여유 있게 바라보지 못했다. 간혹 밥이라도 한 끼 같이 하자는 친구의 전화도 다음으로 미루었다. 남편을 도우는 일과 생활의 기본적인 것만 해결하다 보니 사람들과도 점점 멀어졌다. 그럴 땐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며 애써 위로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시험기간이 끝났는가 하면 또다시 가파르게 진행되는 강의로 나는 학기 초부터 교수님들의 강의를 모두 녹음했다. 공부를 마쳤을 때 진도 따라가느라 대충대충 수강했던 귀중한 강의를 운전을 할 때나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시 듣고 글 쓰는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다. 영어권에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모국어에 남다른 관심을 기우려야 한다. 문학 지면을 통하여 앞서가는 고국 문학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강의 때 제출되는 교안도 모두 출력해서 연도별 학기별 전공별로 박스에 담아 혹 생길지 모르는 곰팡이 방지를 위해 탈수제를 넣어 보관해 두었다 이제는 이것이 나의 재산목록 1호가 되었다.
2008년 12월이 되자 거리는 성탄절, 연말연시 준비로 오색등이 켜지고 분주했다. 그러나 나는 곧 끝날 학업과 2009년 2월에 있을 졸업식에 참가할 준비에 어느 해보다 마음이 들떠 있었다. 염려되는 것은 이번 졸업생 중 아니 경희사이버대학 설립 후 가장 나이 많은 학생으로 호기심어린 시선이 쏠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가장 기쁜 것은 영상으로만 보았던 교수님들과 학우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이 들어 학위 받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워 멋있잖아. 프라우드하게 생각해”라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한해 전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국 나가서도 교수님들과 학우들 만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뉴욕으로 곧장 돌아왔다. 젊은 그들과 나 사이의 제너레이션 갭은 상상만 해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나이 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자기 위로의 말이 아닐까.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진 시대에 이러한 말이 심심찮게 나돌지만 얼굴의 나이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피지컬 에이지는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지천명을 지나 귀도 순해진다는, 간혹 죽음이 나와는 상관없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는 나이, 나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가장 멋지게 늙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새벽 다섯 시에 도착한 인천공항은 다시 보아도 그 규모가 어느 선진국에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고 현대적이었다. 잠을 설치고 마중 나온 어릴 적 친구의 차를 타고 광명시를 향해 달리는 내 마음은 새벽 공기만큼 상쾌했다.
졸업식 날 일찍 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약간 경사진 언덕을 오르자 ‘文化世界의 創造’ 교시가 우뚝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 뒤로 영상으로만 수 없이 보았던 네오르네상스 본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슴 뿌듯한 학위수여식 후 그동안의 힘들었던 모든 기억을 사각모와 함께 공중으로 날렸다. 졸업 축하 뒤풀이는 일차로 학교 근처의 감자탕 집에서 교수님과 선배 후배 모두 모였다. 모두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얼굴을 직접 대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학과 게시판이나 동아리에서 글로 자주 만나서 그런지 생각보다 그리 낯설지 않았다. 늙은 학생이라며 상대도 해주지 않을 것에 대한 염려는 순전히 나의 기우였다. 사이버대학인만큼 원근 각처에서 모인 졸업생과 재학생 연령층도 다양했다. 그래도 나 같은 늙은이는 없는 듯했다. 누군가의 배려로 교수님과 나란히 앉았다. “오프라인 수업은 연극이고 온라인 수업은 영화다”라는 명언을 했던 홍용희 교수님이었다. “복 복 자씨 멀리서 왔으니 특강 한 번 합시다” 그렇게도 참석하고 싶었던 문학 특강, 문학 MT 나는 손자까지 있는 내 나이를 잊은 채 “정말이시죠 아이고 좋아라”하며 일어나 절을 꾸벅 했다. 공부를 마쳐도 문학적인 분위기에 늘 젖어 있고 싶어 교수님들의 강의를 모두 녹음해서 운전할 때 다시 듣곤 한다고 했더니 “여기보다 더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사시네요”했다. 학생들 사이사이에 교수님들이 않으시고 온통 이야기는 문학에 대한 것 뿐이었다. 누가 이번 신춘에 누구보다 글이 더 좋았는데 떨어져 분개한다는 둥 새 시집을 낸 아무개의 시가 차별이 난다는 둥 대학에서의 문학수업은 학문적인 것이기 때문에 졸업 후 이제부터 좋은 시인이나 지도자를 모시고 창작에 열중해야 한다는 둥 문학정보에 어두운 나는 귀를 세워 야심찬 저들의 대화에 빨려들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차 생맥주 집으로 모두들 자리를 옮겼다. 참으로 오랜만에 대해보는 오백시시 생맥주, 꿈은 있으나 철은 없었던 20대 명동 OB 뚜우루, OB 캐빈에서 통기타 곡조에 발장단을 치고 윤복희가 유행시킨 미니스커트를 폼 나게 빼입고 가방에는 버스비만 달랑,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이 모르는 젊음이 재산이라며 순 멋으로 들이켰던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쌉쌀하고 시원한 맛 문우들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삼차는 커다란 짱구네 학칙이 벽에 붙어있는 야식집이었다. 1. 술값은 현금이다. 2. 술은 취하라고 먹는 거다 빼지 말고 다 마셔라. 3. 손님이 많을 땐 물은 셀프다. 등 애교 섞인 학칙은 잠시 나를 젊은 학생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짱구네 집의 식사는 김치, 계란 프라이가 하얀 쌀밥 위에 얹힌 찌그러진 추억의 양은 도시락이었다. “이건 흔들어 비벼야 맛있어” 누군가 냅다 도시락을 흔들었다. 우리는 한 숟갈이라도 더 퍼먹으려고 상대방의 숟갈을 제치며 머리를 들이밀었다. 왜였을까? 문득 며칠 후 돌아가야 할 뉴욕이 떠오르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눈물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
내가 여태 문학의 끈을 놓지 못한 까닭은 초등학교 2, 3학년 때의 기억 때문이다. 어머니 날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오늘은 어머니에 대해서 글을 쓰라며 원고지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새벽부터 일어나 막국수 장사를 나가기 위해 큰 양푼에 하나 가득 파를 다듬고 썰고 마늘을 찧고 멸치 다시 물을 준비하고 양념거리를 만드는 어머니를 365일 보며 성장했다. 학교 마치고 어머니가 있는 충무로 사십 계단 바로 밑에 있는 천막 친 막국수 가게로 가면 “배 고프제” 커다란 양은그릇에 막국수 한 그릇 고추장 푹 떠 넣어 비벼주던 어머니. “우리 막내 우리 막내 지 애비 얼굴도 기억 못하는 것” 하시며 밤에는 막국수 양념과 다시국물 냄새에 찌든 뻣뻣한 적삼 품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나는 말랑말랑한 어머니 젖을 쪼물락거리다가 잠이 들곤 했다. 가난이 먼지처럼 뿌옇게 내리 덮인 산동네 단칸 방 슬픔으로 채색된 내 유년의 그림자를 나는 있는 그대로 썼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 “복 복자 일어나 어제 어머니에 대한 글짓기 한 것 읽어봐 아주 잘 썼어” 남학생들의 야유를 받으며 글짓기 한 것을 읽다가 그만 풀썩 앉아 울어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어린 맘에도 우쭐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나를 문학의 길로 이끈 등대 같은 역할을 했다.
내 본명은 복 복자이다 호적상으로만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본명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유년의 나를 열등감에 빠지게 했던 이 이름을 짓게 된 동기는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었다 한다. 일본에서 여유 있게 사시던 아버지가 형제 곁에 살아야 한다며 한국으로 나오자마자 장질부사에 걸렸다 한다. 그 때 막 태어난 나와 아버지를 한 요에, 아버지는 이쪽에 나는 아버지의 반대쪽에 뉘여 놓았다 한다. 아버지는 꼬물거리는 나를 죽 잡아당겨 내가 없어도 복 있게 잘 살아야 한다고 복자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어릴 적 이름 때문에 짓궂은 아이들에게 못생긴 복지, 알 벤 복어라며 놀림도 많이 받았다. 큰어머니를 따라 가 본 어시장에서 처음으로 배가 볼똑 나온 복어를 유심히 보았다. 복어도 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 흔한 영자라는 이름이라도 지어주지 않고 하필이면 이름하고 성하고 같아서 어릴 적 내내 놀림이나 받게 한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를 오랫동안 원망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이름 복자를 다시 찾고 싶다. 어떤 이름이든 이름에는 그 사람과 어울리는 무늬와 결이 배여 있다는데 나는 내 이름에 어울리는 어떤 결이 배여 있을까. 복이 두 개나 겹쳐있는 이름이지만 실제 복이 그리 많은 편일까. 대학에서는 호적상의 이름인 복 복자 덕분에 한 번 내 이름을 본 교수님들과 학우들은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이번 졸업식에 참석했을 때에도 복 복자 학우 어떻게 생겼지? 궁금해서 나를 위해 갑작스런 만남을 주선하는 번개팅에 일부러 나왔다는 학우도 있었다. “이름하고는 영 딴판이네요 호호호 ㅋㅋㅋ” 어린 학생들은 금세 나를 왕 선배라 불렀다. 뒤풀이에 참석한 ‘산정’ 시집으로 널리 알려진 조정권 교수님은 즉석에서 ‘나의 시 나의 삶’이라는 주제로 알찬 문학 강연을 열었다. 교수님은 40대에 술로 간경화 간결석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고 모든 사람들과 담을 쌓았다고 한다. 자신까지도 벽으로 삼았다 한다.
“5년 동안 독재자로서 너에게 명령한다. 시를 쓰라!” 자신에게 명령하고 복종했다고 한다.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둥그런 밥상에서 시만 썼다고 한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추운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이렇게 그 유명한 33편의 장시 산정은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정권 교수님의 딸이 우리 학과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 딸에게 “나 오늘 복 복자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아 그 복 복자 할머니?”하더란다. 집에 돌아간 교수님께서 “야 복 복자 만나고 왔는데 할머니도 아니더라. 뭐 나는 복 복자 딸이 온 줄 알았다”고 하셨데나. 조 교수님의 딸 조채린 연구원에게 처음 입학해서 인터넷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얼마나 어렵고 생소한지 한국과 이곳의 시차로 밤을 새며 문의전화를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20대의 연구원이 태평양 너머 늙은 학생을 할머니로 본 것은 당연한 것. 교무실에서는 외국에 거주하는 학생 중 학교로 가장 문의전화 많이 하는 못 말리는 할머니 학생으로 소문이 났다는 것도 후에 알게 되었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고려대 특강까지 맡게 된 조정권 교수님은 바쁜 와 중에도 “나랑 같이 늙어가는 늦깎이 제자를 위해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주고 싶다”며 몇몇 학우들과 함께 강화도로 여행을 떠났다. 강화대교 아래의 물빛은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 빛깔로 물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부터 강화도로 접어드는데 다리는 소통의 단계를 뛰어 넘어서 합일을 이룬다. 다리는 독자와 저자와 같다. 다리는 연인과 같이 불안한 것”이라며 이처럼 모든 사물은 살아 있어 그들이 온몸으로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송구하게도 늙은 교수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강화도 풍경을 마음에 담으며 이어지는 교수님의 추억담에 귀를 기우렸다. 양정 고교 1학년이었을 때 국어를 가르치며 문예반 지도교사로 있었던 김상억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생은 문예반 학생들을 인솔하고 동구릉으로 가을소풍을 갔단다. 선생은 가는 도중 양조장에 들러 막걸리 몇 통을 준비해 지게꾼에게 지웠다고 한다. 능에 도착해서 모두에게 능을 향하여 큰절을 시킨 다음 술을 가르쳤다 한다. 시인이 되려면 막걸리를 잘 마셔야 하는데 막걸리의 뜻풀이는 클 막(莫) 호걸 걸(傑) 마을 리(里)라고 하였단다. 문예반 학생들은 호걸들이 사는 마을을 상상하며 막걸리 같이 흔한 아무 것도 아닌 말에도 기품과 격이 있음을 배웠다 한다.
이런 것이 문학이 아닐까. 사소한 것, 하찮은 것, 불쌍한 것, 사람들이 무심하게 놓친 것들을 현실의 속도와 떨어져 느리게 가면서 주목하고 그것에 생명과 의미를 불어 넣는 것.
나는 이제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할 것이다. 전원을 끄고 홀로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늘려 진정으로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 있는 결핍을 다룰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토양 미국에서 쓸쓸한 사람, 외로운 사람,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에게 따뜻하게 위로가 되는 글을 쓰리라. 그리고 누군가 나의 졸작을 읽고 그의 눈에 얼핏 이슬이 맺힌다면 세월에도 나이에도 구애받지 않고 나의 남은 생을 바치리라.
독일시인 권터 아이히는 포로수용소 시절 땅에서 주운 연필심 한 개를 빵 주머니에 숨긴 채 밤이면 몰래 시를 썼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일평생 책상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몽당연필 심 하나가 그의 시를 그의 고독을 그의 삶을 견디게 해 주었다.
# 당선 소감 - 존재해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경이로와
입상발표 하는 날 될 리가 없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초조한 마음 시집을 뒤적이며 서성거리다 메일을 열었습니다. 당선 소식을 접하는 순간 설마 내가, 마음을 가다듬고 메일을 다시 읽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어린 저에게 고독을 가르치고 떠난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책을 읽었습니다. 책 속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과 웃고 웃습니다. 문학은 저에게 충만한 즐거움을 주기보다 아득한 절망에서 더욱 시달리게 했습니다. 물론 저의 삶의 힘든 굽이마다 저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만 수시로 열등감과 소심함에 부대끼게 했습니다. 인생의 오후반이 확실한 저에게 아직도 거부할 수 없는 긍정과 부정의 사이 길에서 오늘도 저는 멈추며 걸어가며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존재해 있다는 것은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문학 그 자체로 돈이 되지 않고 밥이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순정과도 같은 열정 하나만으로 언제나 저토록 따뜻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보이는 형상만이 노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식물과 바람, 공기, 태양, 나무, 강물과 주고받은 언어로 어두운 절망이나 우울에 빠진 사람에게 밝고 희망과 행복의 느낌을 주는 글을 쓰는데 주력하겠습니다. 또한 제가 앞으로 쓰는 글이 고향을 떠나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의 속눈썹에 이슬이 맺혀 그 맺힌 이슬만큼 아픔이 덜어진다면 저는 그 분으로 인하여 힘을 얻을 것입니다. 제가 쓰는 결함과 약점이 많은 글이 독자에 의해 완성되길 바랍니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저에게 휘장 속에 감추어 두었던 기억을 햇빛아래 꺼내 놓은 저의 부끄러운 글에 생기를 불러일으켜 저의 삶에 기운을 주신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기쁨을 플러싱 제일교회 김중언 목사님과 교우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심사평 - 희망의 메시지 이민자들에 귀감
예년에 비해 응모작품 편수는 두 배로 늘어났으나 질이 향상된 것은 아니었다. 문학이 그만큼 일반과 친해졌다는 의미로 보면 즐겁지만, 공부 안 하고 기초 없이 문학에 입문하려는 이들도 많아 안타깝다.
생활 수기는 혼자만이 읽는 일기와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남들에게 읽히길 바라고 쓴 논픽션 장르의 글은 객관성이 있어야 하고 사실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감동도 있어야 한다. 감동은 눈물을 꼭 흘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해학으로 은근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도 공감을 느끼게 할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문예공모전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문학성 또한 배제 할 수 없는 요소이다. 대체로 간병기나 병상일지 수준의 글이 많았고 지나치게 비극적인 글이 많아서 읽는 이가 위로는커녕 걱정을 늘릴 글이어서 아쉬웠다. 응모 요령에 보면 글의 길이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어 있다. 그 점을 지켜주는 것도 공모전의 상식이다.
다행히 당선작으로 선한 세 편의 글은 문학성도 있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데다, 오랫동안의 이민생활에서 축적된 삶의 경험을 나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이민문학의 방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응모작 대부분 이순을 넘기신 분들의 글이기도 하고 이민 선배들의 글이어서 선험을 듣는 기분으로 울고 웃었다.
당선작으로 뽑은 복영미씨(퀸즈빌리지, NY)의 글 ‘꽃다발 없는 나이, 그 졸업식’은 늦은 나이에 학문에 대한 갈증으로 사이버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하기까지의 수학기를 재미있게 그렸다. 이미 시인으로 등단하고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문학에의 열정을 가지고 그걸 실천한 도전정신은 이민자에게 귀감이 된다.
가작으로 선한 황명숙씨(엘에이, CA)의 글 ‘세월을 견디는 사람들’은 21년간 사회복지국의 소셜워커로 일하면서 만난 많은 장애인과 노인들의 케이스를 그렸다. 진지한 논픽션 글이나 자료의 성격이 강하고 감동부분이 조금 미진하였다. 그 점을 보완하면 앞으로 좋은 글쓰기를 기대해도 좋겠다.
장려상으로 선한 켈리 리씨(실버스프링, MD)는 1.5세의 주부이면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한국의 교육현장에 투입이 되어 체험한 이야기 ‘헤이, MS. 켈리’를 보냈다. 한국의 교육여건이나 사회상을 볼 수 있는 르포 형식의 글이다. 원어민 영어교사로 한국을 방문하는 1.5세나 2세가 많아지는 추세에 도움이 되리라 싶다.
오늘은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첫째 날이기도 하니 너무 늦은 시작은 아니란 말씀으로 축하드린다.
이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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