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죄값대로 벌금을 책정하는 제도를 ‘총액 벌금제’라고 한다. 이 제도는 일견 평등해 보이지만 부자들에게는 별로 형벌의 의미를 지니지 못해 후진적인 징벌제도로 평가된다.
이런 불균형을 바로 잡고 형벌의 의미가 공평하게 적용되도록 하기 위해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소득수준에 따라 벌금을 차등 적용하고 있다. 이른바 ‘일수 벌금제’다. 몇 년 전 할리 데이비슨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과속으로 걸려 거액의 벌금을 냈던 핀란드 최고기업 노키아의 부회장이 대표적 사례이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수십 유로나 수백 유로에 그쳤을 벌금이 노키아 부회장의 경우 무려 11만6,000 유로였다. 수천만 유로에 달하는 연봉을 기준으로 계산된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벌금도 세금처럼 소득수준에 따라 내는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교통위반 차량을 세운 경찰이 가장 먼저 묻는 말은 “당신 소득이 얼마냐”이다. 이것이 북구의 강소국 핀란드의 사회적 분위기이자 합의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핀란드의 복지는 최고수준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부자들의 희생과 관용이다. 상위계층의 세율은 50%를 넘나드는 살인적 수준이다. 그런데도 별다른 조세 저항이 없다. 상위 납세자들의 명단이 전화번호부처럼 매년 투명하게 공개돼 누가 얼마나 벌고 얼마를 세금으로 냈는지를 전 국민이 다 알 수 있다. 가진 사람들의 도덕적 책무를 뜻하는 ‘노불리스 오블리주’가 확고히 뿌리 내리고 있다.
세금은 조세논리로 접근해야 할 문제임에도 성격상 정치적인 색채를 벗어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세금을 둘러싼 다툼은 종종 이념논쟁으로 비화된다. 지금 한국과 미국 두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갈등이 그렇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세수 부족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강행하겠다고 밝히면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보수 신문인 월스트릿 저널이 사설을 통해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의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는 나라”로 꼽은 곳이 바로 한국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미국을 지배했던 레이거노믹스의 요체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이론이다. 쉽게 말해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부자들에게 감세를 통해 소득을 더 안겨주면 이것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 내려와 하위 계층에도 혜택을 안겨준다는 주장이다.
시혜적 인식이 강한 논리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잔칫상에서 흘러내린 음식물을 주워 먹었던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죽어서는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지옥 불에 떨어지지만 현실에서는 곤고하기 짝이 없는 것이 나사로의 삶이다. 조금은 밑으로 흘러내릴지 몰라도 파이의 크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격차는 날로 벌어진다.
한국과 달리 진보적 성향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미국에서는 부유층 세금인상이 추진되고 있어 대조적이다. 대통령은 부자들에 대한 세금 감면을 없애겠다고 밝히고 민주당 주도 의회에서는 연 소득 수십만 달러 가구에 세금을 더 부과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개혁안도 부유층 증세 여부에 성패가 달려 있다. 부자들이 부담을 더 많이 떠안지 않으면 개혁은 성사되기 힘든 상황이다.
부자들에 대한 세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았던 1950년대 미국은 계층 간 소득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념적 간극도 심하지 않았다. 민주당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에게 표를 던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부자들이 한층 더 부자가 되면서 이런 정치적 낭만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미국의 정말 큰 부자들은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쾌척하는 것은 기본이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과 대비되는 미국 억만장자들의 이 같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사회를 바꾸기에 충분한 동력은 되지 못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좀 더 나은 사회로 가는데 밑거름이 되려면 일부 부자들의 개인적 각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정신은 핀란드의 조세제도처럼 점차 시스템화 될 필요가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줄다리기는 바로 이것을 둘러싼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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