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 주막집.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초가집만 썰렁하다. 막걸리라도 마련해 두어 목마른 길손들이 한 잔 술로 목을 축일 수 있게 한다면 더 좋으련만. 용추골. 맑고 푸른 새재 계곡의 물이 용추골 깊은 못에 뛰어내려 잠깐 머물렀다 흐른다. 그 앞에 정자가 있다. 교귀정, 경상감사의 업무 인수인계 장소다. 임금의 신임장을 가지고 서울에서 내려온 신임 경상감사가 이 정자에 앉아 퇴임 감사로부터 업무를 인수 받았던 곳이다. 바로 옆에 잘 생긴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교귀정 쪽으로 구부정하니 허리를 굽혀 있다. 인수인계를 잘 하고 있는지 살펴보느라 저렇게 허리가 휘어져 버린 게 아닐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나무 때문에 경상감사들도 업무를 해찰하지 못했을 성 싶다.
재넘은 수많은 묵객들 흔적, 시비로 남아
반가운 마음에 들른 주막은 썰렁하기만
영남대로였다는 옛 과거 길을 따라간다. 이 길은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으며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하여 영남은 물론 다른 지방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걷고 개울도 건넌다. 선비들이 푸른 꿈을 안고 걸어갔던 길이다. 한 바퀴 돌아나오면 다시 큰 길과 만난다.
여러 개의 돌무더기가 보인다. 소원 성취 탑이다. 원하는 것을 말하며 돌을 던지면 소원을 달성하게 된다고 한다. 한 아가씨가 돌멩이 하나를 가만히 얹어 놓고는, 가는 길을 재촉한다. 저 돌멩이에 무슨 소원을 담았을까. 돌무덤에 쌓여 있는 돌멩이 하나하나의 사연을 풀어 놓으면 여러 권의 소설이 태어나겠다.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길가 도랑을 타고 흐르는 물로 방아를 돌린다. 손에 물을 적셔보니 차다.
벽이 보인다. 높은 성벽이다. 벽을 보면, 당신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벽을 보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우리가 의식 속에 쌓아놓은 장벽은 저 보다 더 높고 견고할지도 모른다.
제 2관문 앞에 섰다. 벽 넘어 세상으로 통하는, 소통의 문이다. 성문을 지나간다. 너와 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벽도, 작은 문 하나로 너끈히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좁디좁은 구멍 하나로도 족하다는 사실을 왜 여태 알지 못했을까.
길 오른쪽으로 바위굴이 보인다. ‘바위굴과 새재우’라는 사랑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옛날 한 여인이 새재를 넘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져 저 바위 속으로 비를 피해 들어갔단다. 마침 고개를 내려오던 한 남자도 비를 피해 바위로 갔더란다. 비 오는 날 바위굴에서 맺은 사랑 이야기다. 사랑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다. 오늘은 하늘이 맑다.
여기 저기 시비가 서 있다. 수많은 묵객이 재를 넘었을 터이니 시가 한두 편이겠는가.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 눈 덮인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다산 정약용이 쓴 시, ‘겨울 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이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가 200년 전에 남긴 시 한 수를 통해 새재가 얼마나 힘들고 가파른 길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른 잎 달랑거리는 칡넝쿨, 벼랑길 험한 길을 걸어가는 선인들, 짐을 지고 끙끙대며 고개를 넘어 가는 보부상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길손 몇이 의자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다.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오디오 장치를 해놓아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나온다. “문경새재 물박달 나무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 후렴 //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 후렴.” 골짜기에 청정히 울려 퍼지는 아리랑 가락이 길손의 마음에 풍파를 일으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새재의 마지막 옛길이 나온다. 올라가는 길은 ‘장원급제길’이라 이름 지었고, 내려오는 길은 ‘금의환향길’이라 명명했다. 장원급제를 꿈꾸고 이 길을 지나갔던 사람 가운데 금의환향했던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나도 두루마기에 갓 쓴 옛 사람이 되어, 괴나리봇짐을 둘러메고 옛길을 싸목싸목 걸어 올라간다.
드디어 제 3관문, 조령관 앞에 섰다. 관문을 지나면 충청북도다. 한참을 걸어 내려오니 주차장이 나온다. 오늘, 문경읍 숙소에서 여기까지 총 14킬로를 걸었다. 아내가 미국에 돌아가기 전에 새재를 넘어야겠다는 목표는 달성했다. 이제부터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은 일정은 혼자서 마무리해야 한다.
교귀정 풍경, 정자 쪽으로 기울어진 소나무의 모습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조상들의 풍취가 절로 풍겨 나온다.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에 만난 물레방아. 자연과 인간의 문명이 조화를 이룬 우리의 멋이다.
바위에 새겨진 문경새재 아리랑. 오디오 장치가 되어 있어 버튼을 누르면 노래가 울려 퍼진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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