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아케나텐은 강했고 투탕카카문은 연약
아케나텐을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는 역사 왜곡
잔존하는 아케나텐의 자료는 대부분 반 아케나텐 성향을 보인다. 아케나텐의 긍정적 행적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를 매장시켜 버리려고 시도했던 오랜 노력은 거꾸로 그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도리어 보여준다. 더욱이 그를 여성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은 그가 얼마나 남성적인 존재였는지 역설한다.
그의 미이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의 미이라는 어쩌면 아주 초기에 파괴 되었을지 모른다. 후계자 네페르티티의 통치가 끝나고 투탕카문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아무래도 그의 무덤파괴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미이라를 없애는 것이 주된 목적 아니었을까? 문제의 그 알라바스터상이 제작된 연도를 주목하라. 주전 1345년이다. 이 해는 투탕카문 집권 제3년이다. 당시 투탕카문은 열한 살 대단히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이(Ay)와 호렘헵(Horemheb) 같은 세력권자들에 의해 조종당한 종이호랑이였다. 최근에 발굴된 투탕카문의 이미지들과 비교해 보라.
투탕카문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않게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저들 이집트 궁중 예술가들은 아케나텐을 등신으로 묘사하는 한편 투탕카문을 소위 “꽃남”처럼 그려냈다. 여성적 이미지의 꽃남이 아니라 장동건 스타일의 꽃남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투탕카문은 누구의 아들인가? 아케나텐 아닌가? 그의 어머니 키야의 아름다운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투탕카문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변형시키기 이전의 아케나텐을 회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투탕카문과 키야를 늘어놓고 상상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케나텐이 강했고 투탕카문은 연약했다. 아케나텐이 남성적 이미지를 풍겼고 투탕카문은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실시한 정책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자주 예술은 현실을 뒤집어 표현해 오지 않았던가!
1907년 1월, 에드워드 아이르톤은 테도도르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왕들의 계곡 발굴팀에서 일했다. 제55번째 무덤을 발굴하던 중에 심하게 물로 부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리쉬(rishi) 타입의 관 하나가 관심을 끌었다. 심하게 지운 자국이 선명해서 누구의 관인지 알기 어려웠다. 데이비스는 그것이 여성의 관이라고 보았고,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라고 발표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아케나텐이라고 수정되었다. 그렇지만 다시 연구를 계속한 결과, 그것은 스멘크카레라고 인정했다. 같은 미이라를 놓고 이렇게 여성에서 남성, 남성에서 다른 남성으로 결과가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여성형으로 제작된 관은 키야를 위해 마련되었고, 실제로 그 안에 들어있는 미이라의 주인공은 스멘크카레였다. 이 무슨 뜻일까?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면 “스멘크카레는 여성”이라는 결론이 난다. 이 여성 스멘크카레는 결국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가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얻은 새 이름이라는 또 다른 결론도 거기서 난다.
본래는 같은 묘지에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와 아케나텐, 그리고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안치되었다. 투탕카문 당시 그의 사주를 받은 역사왜곡자들은 타이와 네페르티티의 미이라를 꺼내고 아케나텐의 미이라에 수로를 대어 파괴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랬는지 그들은 실수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덤에서 꺼낸 것은 아케나텐의 미이라였다. 꺼낸 후 다른 곳에 묻었다면 “왕들의 계곡”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어딘가에 아케나텐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실수가 아니라면, 무덤 파괴자들은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파괴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없애버렸을 것이다.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물로 침수시켜 썩게 하려고 했는데, 썩은 것은 그의 스멘크카레, 곧 네페르티티의 미이라였다.
아케나텐 이 제18왕조의 여러 파라오들과 다른 친척들에게서 두드러진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행했던 독특한 사건, 즉 “일신주의 개혁”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 현존하는 아케나텐에 대한 그림과 조각은 모두 후대에 만든 것이다. 그 당대의 것들은 이미 제거되었다. 후대에 묘사한 아케나텐은 그저 “제18대 왕조의 사람”일 뿐이었다. 게다가 투탕카문을 제거한 아비도스와 카르낙 리스트는 아케나텐도 제거 대상에 포함시켰다. 구체적으로 아케나텐부터 네페르티티와 투탕카문까지, 그리고 아이(Ay)까지 모두 없애버렸다. 그 리스트는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부터 제14대 파라오 호렘헵으로 건너뛴다. 제10대 아케나텐, 제11대 네페르티티, 제12대 투탕카문, 그리고 제13대 아이까지 네 명의 파라오가 그 공식명단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헵이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는 종교개혁이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고, 투탕카문은 그 종교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는 반개혁적 개혁의 허수아비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었고, 아이는 내부 권력투쟁 탓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전 1477년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73년이나 지난 후에 집권한 그는 확실히 그 다음 세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집트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섬긴 아텐(Aten)을 여호와를 음역한 “아도나이”(Adonai)와 어떻게 일치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지만 근거가 박약하다. 도리어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한 이집트식 해석에 따라 기존의 많은 이집트 신들 중에 가장 유사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케나텐은 그의 통치 제5년, 즉 1360년에 오늘 텔 엘-아마르나로 불리는 아케타텐(“아텐의 수평선”)에 수도를 옮기고 신전을 세웠다. 태양신 아텐은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품었다. 너무 강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은 아텐을 직접 숭배할 수도 없었다. 단지 왕족들만 아텐의 생명부여 능력을 혜택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아텐만 섬기기로 한 아케나텐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아케나텐은 이집트 전역을 개혁의 도가니로 바꾸어 버렸고, 과감한 천도까지 단행했다. 그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역대 파라오 중에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를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한 것은 말하자면 “왜곡”이다. 한 개인만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결단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역사화 된 새로운 물결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피나는 노력에서 난 “역사왜곡”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읽기를 오늘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만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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