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 열정 강조는 무리
열린 마음 자세가 효과적
지난달 LA 다운타운 노키아 극장에서 있었던 앤드루 리우 음악회에 가서 오랜만에 생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귀에 익은 왈츠, 클래식 소품, 오페라 아리아 등의 연주와 함께 앤드루 리우 특유의 유머러스한 ‘연기’를 섞어서 두 시간이 넘도록 청중에게 즐거움과 웃음을 선사한 공연이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주자들의 연주에 빠져 있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바로 앞줄에 앉아 있는 한 동양인 가족을 주목하게 되었다. 6~7세 된 남자아이와 2세 정도 어린 여자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였다.
아버지가 한쪽에 남자아이를 앉히고, 여자아이는 무릎에 올려놓고, 함께 박수치고, 함께 허밍하고, 함께 웃고, 가끔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등 자녀가 연주를 이해하고 즐길 수 있도록 최대로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너무 사이가 좋아 보이는 이 가족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 특히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교육비를 벌어들이는 데에만 치중했던 전통적인 아버지의 역할을 벗어나서, 자녀와 함께 행복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는 아버지의 노력이 아이들의 장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는 입장료를 내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이 젊은 부모는 아마 음악회뿐 아니라, 미술박물관이나 과학박물관, 해양박물관에도 자녀를 데리고 갈 것이며, 스포츠 경기에도, 야외 캠핑에도 데리고 갈 것이라고 짐작해 보았다.
실제로 눈앞에서 본 부모의 모습에다가 나의 상상을 합쳐서 창조해 본 이같은 모범적인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이들은 참으로 운 좋은 아이들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졸업시즌도 지나고, 이제 곧 학생들이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2년제 대학으로 시작하든, 4년제 대학으로 시작하든, 신입생들은 조만간 어떤 방향으로든 전공을 정해야 한다. 학생에 따라서는 3학년이 되어야 비로소 전공을 정하기도 하지만, 경쟁이 심한 분야일수록 빨리 전공을 정해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하다.
같은 전공을 하는 동료학생들과, 교수들과 좀 더 긴밀한 유대를 맺을 수 있고, 졸업이 4년 이상으로 연기될지 모르는 부담이 줄고, 졸업 후의 커리어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시간이 충분하다.
이런 이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전공을 선뜻 정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학에서 제공하는 수백 개의 전공과목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자신의 능력에도 맞고, 적성에도 맞고, 졸업 후 취업기회에도 플러스가 되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에 대학생활을 시작해 보고 선택과 결정은 천천히 하는 것이 경솔하게 결정하는 것보다 낫다는 입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카운슬러로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자주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잘 모를 경우에는 네가 평소에 품고 있던 열정(passion)을 따르라”는 조언을 해 왔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 자신이 품어 왔던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이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조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생각해 왔듯이 모든 사람이 다 열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열정이란 단순히 ‘역사는 싫지만, 수학은 좋아한다’거나, ‘운동은 싫어하지만, 디자인하기는 좋아한다’는 식의 호불호의 정도를 넘어서, 만인이 원하는 부와 명예와 안락한 생활을 기꺼이 포기해서라도, 심취한 분야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경지의 결의를 말한다. 실제 세상에서 이런 정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이 별로 효과적이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열정이라는 것이 불모지에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예술이나 학문, 운동에 대한 열정을 타고났다 해도, 환경의 도움 없이는 그 꽃이 필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했거나 관찰해 왔다. 일찍부터 다양한 문화적 경험에 노출되어보지 못한 아이들은, 위에서 말한 노키아에서 만난 가족의 아이들에 비해서 자신의 열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가능성이 적다.
전공 선택 과정에서 자신의 passion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학생들에게 나는 passion의 반대쪽을 훑어보라고 권한다.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적성에 맞지 않거나, 생각만 해도 고개가 흔들어지는 전공이 있다면, 이런 전공을 일찍이 선택 리스트에서 제거해 버리는 방법이다. 아무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의사가 되고 싶고, 의과대학에 갈만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피만 보면 질겁하는 학생이라면, 전공 리스트에서 의학을 빼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위기니, 취업대란이니 하는 불안한 현실이 주요 뉴스를 이루는 요즘, 열정이니 적성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사치스러운 얘기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시작한다면, 전공을 찾는다는 과정이 오히려 재미있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 순진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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