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파라오 아케나텐 이집트 종교 개혁 실시
모든 신버리고 태양신 아톤을 유일신으로 섬겨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은 이집트 종교 역사상 가장 특이한 일을 꾸몄다. 그의 재위 제6년에 종교개혁을 실시한 것이다. 아몬을 위시한 모든 신들을 버리고 태양신 아톤(Aton)을 유일신으로 삼았다. 그는 본래 “아멘호텝”이었는데 그 뜻은 “아몬은 만족한다”였다. 그런데 스스로 이름을 “아케나텐”(Akh-en-Aten/Aton)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아톤이 형통케 한다” 라는 뜻이다. 아문(Amun) 신의 도시 테베(Thebes)를 버리고 아마르나로 천도했다. 아마르나는 하이집트 가운데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다. 오늘은 텔-엘-아마르나(el-‘Amarna)라고 부른다. 이것이 “아마르나 개혁”이다. 이집트가 아마르나를 수도로 삼았던 시기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부른다. 아마르나는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건설된 약 15년 후에 파괴되었다.
아마르나 시대는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1402-1364)부터 제10대 아멘호텝 4세(“아케나텐,” 1364-51), 제11대 네페르티티 (“네페르네프루아텐,” 1351-47), 그리고 제12대 투탕카문(1347-37)까지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시대(1397-1357)와 초기 사사시대(1357-1040)와 대략 일치한다.
아텐은 태양신이다. 아케나텐의 개혁으로 아텐이 독존했다. 다른 모든 신들은 파괴되었다. 전통적으로 다신공존에 익숙했던 고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그 시기를 악몽으로 묘사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왕들과 엘리트에 국한되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 대신 왕을 신으로 받들게 했다. 이에 비하여 요시야는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의 유일신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개혁했다. 아케나텐의 아텐 신앙은 지적이고 추상적이며, 이상적이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공감대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은 어땠나? “출애굽의 하나님”이었다. 역사의 하나님이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기억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
그의 후계자는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아문-레(Amun-Re) 신앙과 절충 시도가 시작되었다. 아케나텐의 개혁에 대한 반대가 급속한 탓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아텐만 섬기는 아테니즘(Atenism)은 지워지고 잊혀졌다. 바로 투탕카문 통치 때다. 투탕카문은 유일신 개혁을 원점으로 돌려버린 파라오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투탕카문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놓은 데서 적어도 이집트는 한걸음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그 길을 달린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투탕카문을 이해할 필요가 생긴다.
후대에 의해서 유일신 종교개혁자 파라오 아케나텐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런 이상주의적 비전이 혼합주의적이며 다신적 신앙으로 대체되면서 이집트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히타이트족이 하비루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를 무너뜨려, 서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람세스 2세(Ramesses II, 주전 1279-1213) 때 와서 세계적 강대국으로서의 이집트 제국을 형성했다. 나는 람세스 2세가 아테니즘을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아니라면, 그는 다신론자다. 그는 여호와 신앙의 유일신적 성격을 증오했을 수도 있다.) 그는 카데시(Qadesh) 전투에서 힛타이트 족을 물리쳤다.
아케나텐의 미이라는 2009년 현재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벽화나 조각품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얼굴이 궁금한 것은, 그의 행적이 대단히 특이하고 놀랍기 때문이다. 어떤 얼굴을 한 사람이기에 그토록 엄청난 역사의 페이지를 썼을까? 적어도 여태까지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보자면 그는 특이하게 생겼다.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이집트 최고의 미인이었던 데 반해 그는 정말 못생긴 사람이었다. 소위 이집트 판 “미녀와 야수”라고 할 수 있겠다.
브루스 휄만은 2009년 5/6월 호 <예일> 지에 실린 “왕조 진단”이라는 소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뤘다. 그의 논문에는 아케나텐의 측면사진이 실렸다. 그것은 주전 약 1345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알라바스터상의 측면을 찍었다. 휄만은 예일대 의대 피부과 교수 얼윈 브래버만의 연구결과를 인용했다. 브래버만은 아케나텐이 양성(兩性)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여태까지 발견된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그는 여성처럼 유방이 발달했다.
허리도 가늘다. 엉덩이도 두드러진다. 손매도 곱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전혀 여성적이지 않다. 남자로 쳐도 참 못생겼다. 주걱턱이고 이마는 특이하게 길다. 그러고 보면 브래버만의 말대로 그의 모습에는 여자와 남자가 모두 들어 있는 셈이다. 그것도 아름다운 여자와 야수 같은 남자가.
물론 이런 기현상에 대하여 여태까지 많은 이집트 학자들이 침묵을 지켰을 리가 없다. 그들 대다수의 의견은 대개 이랬다. “아케나텐은 창조신을 섬겼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를 묘사할 때 여성형이던 창조신의 이미지를 투입시키게 했다.” 그러나 휄만이 제대로 지적한 것처럼 아케나텐 시대의 이집트 예술은 대단히 “자연적”이었다. 어떤 이미지를 강조하지 않고 사실묘사에 집중했다. 말하자면 아케나텐에 대한 묘사도 있는 그대로라고 단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아케나텐의 남녀 혼성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브래버만은 아케나텐의 아들, 딸들, 그리고 제18왕조의 앞선 파라오들을 낱낱이 연구했다. 그 결과 얻은 그의 결론은 이랬다. “고대 이집트 조각가들이나 화가들이 아케나텐과 그 식구들을 묘사할 때 사실주의 입장에서 정확했다. 그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비정상적인 속성을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2009년 4월 21일, 내과 학회지 Annals of Internal Medicine에서 브래버만과 그의 동료 교수들은 제18왕조의 남성 파라오들과 어린 소녀들에게서 드러나는 비정상적인 유방과 엉덩이 발달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로마타세 과잉 신드롬”이라고 정의했다. 비정상적 유전 때문에 체내에 에스트로겐이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파라오들의 목소리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아름답고 여성적인 목소리를 자랑했다. 브래버만은 아케나텐과 그의 친척들의 비정상적으로 생긴 이마 모양도 제2차적인 유전적 결함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결론지었다. 다음은 브래버만의 말이다. “실제로 제18대 왕조 멤버들은 이런 모든 문제점들을 야기한 어떤 공통된 변형 유전 문제를 공유했을 것이다. ... 이런 우리의 진단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은 DNA 조사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아케나텐의 미이라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버만은 제18왕조 파라오 중에 여태까지 발견된 다섯 미이라를 한꺼번에 체계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단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당장이라도 연구자금을 확보해서 프로젝트를 설치하고 우수한 인재를 모아 이집트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집트 제18왕조의 예술이 사실성에 바탕을 둔 묘사가 전체적 분위기였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는 맹점이 있다. 왜 그렇게 사실묘사를 전체 분위기로 깔아 놓았을까? 어떤 특별한 동기는 없을까? 아케나텐이 실시한 어떤 정책을 근본적으로 뒤집기 위해, 말하자면 그를 격하(格下)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지는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그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세상에 사람과 짐승을 한데 묶은 것은 있어도 남자와 여자를 하나의 이미지로 섞은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불교 같은 종교에서 선한 모습으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있기는 하지만, 아케나텐의 경우는 역겹다. 이런 부정적 이미지 조성이 본래 제작 의도는 아니었을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견해, 즉 제18왕조가 여성형으로 묘사된 창조신에 대한 특별한 신앙을 강조했기 때문에 아케나텐과 그의 친척들에 대한 묘사가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쉽게 부정된다. 아케나텐이 섬긴 아텐의 성격을 오해한 데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아텐은 결코 여성적 이미지를 지닌 신이 아니다. 아울러 브래버만과 그의 동료들처럼 아케나텐을 유전학적 분석으로 다 알았다고 말하는 의학자들도 코끼리를 만진 장님에 다름 아니다. 아케나텐에 대한 자료는 “묘사”의 문제지 “유전”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유전학적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당대 예술가들은 궁중에 고용된 하수인 격일 터, 그들은 가능하면 긍정적 이미지 창출을 위해 정성을 쏟았을 것이다.
잔존하는 아케나텐의 자료는 대부분 반 아케나텐 성향을 보인다. 아케나텐의 긍정적 행적을 철저히 파괴하고 그를 매장시켜 버리려고 시도했던 오랜 노력은 거꾸로 그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존재였는지를 도리어 보여준다. 더욱이 그를 여성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은 그가 얼마나 남성적인 존재였는지 역설한다.
그의 미이라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그의 미이라는 어쩌면 아주 초기에 파괴 되었을지 모른다. 후계자 네페르티티의 통치가 끝나고 투탕카문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아무래도 그의 무덤파괴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의 미이라를 없애는 것이 주된 목적 아니었을까? 문제의 그 알라바스터상이 제작된 연도를 주목하라. 주전 1345년이다. 이 해는 투탕카문 집권 제3년이다. 당시 투탕카문은 열한 살 대단히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아이(Ay)와 호렘헵(Horemheb) 같은 세력권자들에 의해 조종당한 종이호랑이였다. 최근에 발굴된 투탕카문의 이미지들과 비교해 보라.
투탕카문은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 못지않게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저들 이집트 궁중 예술가들은 아케나텐을 등신으로 묘사하는 한편 투탕카문을 소위 “꽃남”처럼 그려냈다. 여성적 이미지의 꽃남이 아니라 장동건 스타일의 꽃남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투탕카문은 누구의 아들인가? 아케나텐 아닌가? 그의 어머니 키야의 아름다운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투탕카문의 모습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변형시키기 이전의 아케나텐을 회복하는 방법은 없을까? 투탕카문과 키야를 늘어놓고 상상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현실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아케나텐이 강했고 투탕카문은 연약했다. 아케나텐이 남성적 이미지를 풍겼고 투탕카문은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실시한 정책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자주 예술은 현실을 뒤집어 표현해 오지 않았던가!
1907년 1월, 에드워드 아이르톤은 테도도르 데이비스의 지휘 아래 왕들의 계곡 발굴팀에서 일했다. 제55번째 무덤을 발굴하던 중에 심하게 물로 부패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리쉬(rishi) 타입의 관 하나가 관심을 끌었다. 심하게 지운 자국이 선명해서 누구의 관인지 알기 어려웠다. 데이비스는 그것이 여성의 관이라고 보았고,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라고 발표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아케나텐이라고 수정되었다. 그렇지만 다시 연구를 계속한 결과, 그것은 스멘크카레라고 인정했다. 같은 미이라를 놓고 이렇게 여성에서 남성, 남성에서 다른 남성으로 결과가 바뀐 까닭은 무엇인가?
여성형으로 제작된 관은 키야를 위해 마련되었고, 실제로 그 안에 들어있는 미이라의 주인공은 스멘크카레였다. 이 무슨 뜻일까?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면 “스멘크카레는 여성”이라는 결론이 난다. 이 여성 스멘크카레는 결국 아케나텐의 정실 네페르티티가 파라오로 등극하면서 얻은 새 이름이라는 또 다른 결론도 거기서 난다.
본래는 같은 묘지에 아케나텐의 어머니 타이(Tiy)와 아케나텐, 그리고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가 안치되었다. 투탕카문 당시 그의 사주를 받은 역사왜곡자들은 타이와 네페르티티의 미이라를 꺼내고 아케나텐의 미이라에 수로를 대어 파괴시키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랬는지 그들은 실수하고 말았다. 그들이 무덤에서 꺼낸 것은 아케나텐의 미이라였다. 꺼낸 후 다른 곳에 묻었다면 “왕들의 계곡”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어딘가에 아케나텐의 무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실수가 아니라면, 무덤 파괴자들은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파괴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없애버렸을 것이다. 아케나텐의 미이라를 물로 침수시켜 썩게 하려고 했는데, 썩은 것은 그의 스멘크카레, 곧 네페르티티의 미이라였다.
아케나텐 이 제18왕조의 여러 파라오들과 다른 친척들에게서 두드러진 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행했던 독특한 사건, 즉 “일신주의 개혁”을 희석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지금 현존하는 아케나텐에 대한 그림과 조각은 모두 후대에 만든 것이다. 그 당대의 것들은 이미 제거되었다. 후대에 묘사한 아케나텐은 그저 “제18대 왕조의 사람”일 뿐이었다. 게다가 투탕카문을 제거한 아비도스와 카르낙 리스트는 아케나텐도 제거 대상에 포함시켰다.
구체적으로 아케나텐부터 네페르티티와 투탕카문까지, 그리고 아이(Ay)까지 모두 없애버렸다. 그 리스트는 제9대 파라오 아멘호텝 3세부터 제14대 파라오 호렘헵으로 건너뛴다. 제10대 아케나텐, 제11대 네페르티티, 제12대 투탕카문, 그리고 제13대 아이까지 네 명의 파라오가 그 공식명단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제18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헵이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 아케나텐과 네페르티티는 종교개혁이 걸림돌이었기 때문이었고, 투탕카문은 그 종교개혁을 원점으로 돌리는 반개혁적 개혁의 허수아비 역할이 끝났기 때문이었고, 아이는 내부 권력투쟁 탓이었을 것이다.
이집트 제18왕조 제10대 파라오 아케나텐의 종교개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전 1477년 발생한 출애굽 사건이 73년이나 지난 후에 집권한 그는 확실히 그 다음 세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모세를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에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집트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섬긴 아텐(Aten)을 여호와를 음역한 “아도나이”(Adonai)와 어떻게 일치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지만 근거가 박약하다. 도리어 “창조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에 대한 이집트식 해석에 따라 기존의 많은 이집트 신들 중에 가장 유사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케나텐은 그의 통치 제5년, 즉 1360년에 오늘 텔 엘-아마르나로 불리는 아케타텐(“아텐의 수평선”)에 수도를 옮기고 신전을 세웠다. 태양신 아텐은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품었다. 너무 강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은 아텐을 직접 숭배할 수도 없었다. 단지 왕족들만 아텐의 생명부여 능력을 혜택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아텐만 섬기기로 한 아케나텐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아케나텐은 이집트 전역을 개혁의 도가니로 바꾸어 버렸고, 과감한 천도까지 단행했다. 그보다 더 강한 이미지를 역대 파라오 중에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그를 여성적 이미지로 묘사한 것은 말하자면 “왜곡”이다.
한 개인만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의 결단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역사화 된 새로운 물결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피나는 노력에서 난 “역사왜곡”이다. 이런 종류의 역사읽기를 오늘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식민사관”에서 만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