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량이 별로 없으신 채 집안에만 주로 계신 친정아버지께 입동무를 해드리고자 전화를 걸면 자주 절기 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오늘은 씨뿌리기를 시작한다는 망종과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서 사이에 끼어 있는 하지에 대한 말씀이 길으셨다. 밤의 길이가 가장 짧은 계절이니 일찍 잠자리에 들어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맞으라시며 왕년의 선생님답게 차곡차곡 절기 설명을 하셨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 메밀파종이며 감자캐기 보리타작 등 일년 중 제일 바쁜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절기인데 일하는 큰딸이 안타까워 짧아지는 밤의 길이로 역설하시는 아버지의 속마음이 엿보였다.
인생의 절기로 치면 얼음이 얼기 시작하는 소설쯤에 서계신 아버지의 고즈넉한 시간이 염려되어 드린 전화이니 알고 있던 내용까지 몰랐던 척 아버지의 절기 강좌를 경청했다. 허물 벗은 듯 삶의 일선에서 조용히 뒤로 물러앉은 아버지가 쳇기처럼 가슴에 자주 걸리곤 하는 내 나이도 인생의 절기로 치면 일기 차가 심한 처서나 이슬이 내리기 시작하는 백로쯤에 서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절기 이야기를 들어선지 마켓에 갔던 길에 감자를 사왔다. 감자를 구워 아이들을 부르니 버터와 치즈부터 먼저 찾는다. 포슬포슬 하얀 분이 나는 감자의 제 맛을 모르는 아이들은 치즈와 버터를 뒤범벅해 감자범벅을 만든다. 덤덤하나 하얀 분에서 나는 아리하고도 달착지근한 감자의 맛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말과 글과 셈과 예절을 가르쳤듯이 감자의 제 맛을 가르치지 못한 게 내 탓이란 생각이 들었다.
눈같이 포슬포슬 하얀 분이 난 맨 감자를 한 입만 먹어보라고 채근하는 엄마와 감자의 제 맛이 온데간데없어진 감자범벅을 한 스푼 권하는 아이들 사이에 안타까운 스푼싸움이 벌어졌다.
한국말이 좀 서툰 막내가 그건 엄마 감자 맛, 이건 우리 감자 맛이라며 휴전을 선언했다. 가미된 맛을 먼저 안 아이들이 감자의 제 맛을 알 리 있겠는가. 기름에 튀겨 소금을 뿌린 사각봉투 속의 후렌치 후라이, 배부른 맹꽁이 모양으로 공기가 잔뜩 들어있는 짭짤한 감자칩에 길이 든 아이들의 입맛이 자연의 맛을 알고 삶의 맛을 알 때까지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맛을 맛보아야 할까. 나물의 쌉싸래한 맛과 찬물의 깨끗한 맛, 야채의 단맛을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지나야 할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맛을 알 때쯤에야 삶의 맛도 알아지는 것 같은 나의 작은 철학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고향에서는 감자를 하지감자 혹은 마령서라고도 했다. 아버지께 여쭤보니 하지 무렵에 수확을 하기 때문에 하지감자이고 감자를 캘 때 보면 땅 속에서 줄줄이 딸려 나오는 모습이 말의 목에 다는 방울 같아서 마령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감자는 장마가 시작되기 전, 여름이 깊어지기 전에 수확을 해 보릿고개를 넘긴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름 먹거리로서의 한몫을 톡톡히 했다.
시골사람들은 한집도 빠짐없이 감자를 심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저수지 근처의 산밭에 감자를 심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 되면 씨감자를 꺼내놓고 감자의 씨눈을 따내셨고 삼태기에 재를 담아 오신 할머니는 토막 낸 감자의 단면에 상처를 달래주듯 골고루 고운 재를 바르셨다.
두 분은 씨눈이 두세 개씩 달려 있는 씨감자들을 싸리망태에 담아 들고 산밭으로 가셨다. 할아버지가 조그맣게 구덩이를 파면서 앞으로 전진하면 할머니가 그 뒤를 따라다니시며 그 구덩이에 자른 감자를 하나씩 넣으시고 흙을 덮으셨다.
집 가까이 남새밭이나 텃밭, 혹은 산 밑의 비스듬한 구릉 밭이나 비탈 밭에 심은 감자는 잡초만 골라내주면 잘 자라주었다. 그리고 유월이 되면 꽃을 피웠다.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쑥 올라와 하나의 꽃이 피고 그 주위의 가지 끝에 다시 꽃이 피고, 다시 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는 꽃차례를 가진 하얀 꽃이었다.
잘못 그린 별 모양처럼 생긴 다섯 잎의 하얀 꽃잎은 조글조글 주름이 져있었고 가운데엔 노랑 꽃술이 톡 튀어나와 있었다. 할머니는 감자가 실하게 들지 못한다며 꽃목을 따내 밭고랑에 던지시기도 했다.
할머니가 싫어하시는 망초꽃처럼 감자꽃도 할머니가 싫어하시는 꽃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계란꽃이라 불리우고 어른들 사이에선 밭을 망하게 하는 풀이라서 망초꽃이라 불리우던 그 꽃은 할머니 눈에 띄는 날이면 뿌리채 뽑혀 비명횡사를 해야 했다. 먹거리가 모자라던 시절에 할머니의 관심사는 온통 가난한 밥상을 채우는 일뿐이었으리라. 산야에 피고 지는 꽃들의 어여쁨보다는 그 밑둥이나 줄기 어디쯤에 매달려 있는 먹거리가 우선이었을 할머니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어린 나는 밭고랑에 던져져 있는 감자꽃들이 불쌍하기만 했다. 연자주빛 감자꽃도 있었다. 할머니는 소쩍새가 울 때마다 하얀감자꽃이 하나씩 피고 뻐꾸기가 울 때마다 자주감자꽃이 하나씩 핀다는 말씀을 하셨다.
감자밭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의 허리가 펴지길 기다리는 일은 참 지루했다. 산그림자가 저수지 깊숙히 잠겨들 때쯤에야 허리를 일으키신 할머니를 따라 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고샅길이나 들길에선 손녀를 늘 앞세우셨던 할머니가 산길에서만은 뒤따라오게 하셨다. 혹시 뱀이 나올지도 모르는 산길의 위험 때문이었다. 타박타박 할머니를 따라 산길을 내려오다 보면 할머니의 눈길을 피해 핀 망초꽃들이 내 작은 종아리를 간지르며 장난질을 해대기도 했다.
하지 무렵이 되면서 수확하기 시작한 하지감자는 밥 위에 얹어 쪄서 밥풀을 묻힌 통감자로 혹은 밥반찬이 되어 사람들에게 포만감을 선물했다. 감자반찬을 만들기 위해 반달놋수저로 감자껍질을 박박 긁어내는 어머니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가 감자 즙이 튀어 하얀 깨곰보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먼저 수확한 집이 감자를 찌면 식기 전에 소반에 담아 옆집 담으로 넘겨주며 첫 수확을 나눠먹던 정서는 아름다웠다.
포슬포슬 분이 나던 하지감자의 추억, 한여름 밤에 마당 위 멍석에서 감자를 까먹으며 올려다보던 하늘의 별들은 소금을 뿌린 것처럼 긴 띠로 늘어서 있었다. 포만감에 멍석 위에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볼라치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논둑을 무너트릴 것만 같이 요란스러웠다. 별과 개구리 소리 속에 빠져 잠이 들라치면 가물거리는 은하수의 무리는 눈까풀에서 멀어지고 시끄럽던 개구리 소리는 귓전에서 멀어졌다. 다시는 느낄 수 없었던 그날 밤 행복한 잠으로의 추락, 그 달콤했던 기억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감자에 대한 또 하나의 추억은 할아버지와 함께 감자를 삶다가 증발해버린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 사건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오일장에 가신 어느 날, 심심한 하오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아홉 살의 어린 나는 감자를 삶아보기로 했다. 가마솥에 물을 붓고 씻은 감자를 넣었다.
솥뚜껑을 덮으려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감자 찔 때면 달캉달캉 소리 내던 솥 안에 엎어놓았던 밥사발이 생각났다. 그래서 물을 퍼온 주황색 바가지를 솥 가운데에 엎어놓고 할아버지를 불렀다. 불을 때달라는 손녀의 청에 할아버지는 활활 기세 좋은 불을 마냥 넣어 주셨고 감자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솥뚜껑을 열어보니 탄 감자가 반수이고 분명 솥 가운데에 엎어 놓았던 바가지가 없어져 버렸다. 대신 물기가 졸아버린 솥바닥에 형체 없이 녹아버린 플라스틱 덩어리 하나가 감자 흉내를 내고 앉아 있었다.
장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입을 가린 채 피식피식 웃으시기만 하고 할머니는 아까운 플라스틱 바가지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시고 오그라진 바가지를 자꾸 만지셨다.
감자에 관한 숱한 추억의 중심에는 할머니가 계시다. 가난하던 시절을 밭둑에서 사시느라 감자꽃처럼 조글거리던 얼굴, 반쯤 접혀져 있던 허리, 종잇장처럼 얇아진 육신에 유난히 총총하던 정신을 놓고 돌아가신 할머니는 바로 그 저수지 근처의 종산에 묻혀 계시다.
나뭇가지 하나 꺽어 넣고 휘휘 휘저으면 한 구루마의 솜사탕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안개가 자주 끼던 그 저수지는 지금도 하오가 되면 여전히 산그림자를 품고 있으리라. 그 산 속 어디선가 소쩍새가 울 때마다 할머니를 닮은 하얀 감자꽃 하나가 피어나고 지금쯤 할머니 무덤가엔 망초꽃이 흐드러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쏟아진 별처럼 피어있는 망초꽃들을 보시고 이제는 끼니 걱정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시는 할머니가 네 식솔들이 참 곱구나 칭찬하시면 까실까실 흰 망초꽃들이 수줍어 바람에 살짝 누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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