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CMA ‘당신의 밝은 미래:한국현대작가 12인전’ - 전시장 스케치
한국일보 미디어 스폰서
작가 임민욱에 따르면 현대미술이란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예술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소통의 부재를 현실에서 찾아보고 풀어나가는 작업, 그러니까 현대미술 전시회는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놓고 “이걸 보세요”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하고 궁금해 하는 관객들의 생각을 초대하는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어제 개막된 LA카운티 미술관의 ‘당신의 밝은 미래: 한국현대작가 12인전’(Your Bright Future: 12 Contemporary Artists from Korea)은 바로 그처럼 우리의 궁금증을 최대한 유도하는 전시회다. 진부한 표현으로 ‘삭막한 이민생활’에 녹슬 대로 녹슨 우리의 생각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 전시장 동선에 따라 작품들을 간단하게 훑어보았다. 작가들로부터 직접 들은 설명을 덧붙였다.
# 2층 입구엔 ‘장영혜 중공업’ 영상물
LACMA 현대미술관(BCAM)의 2층에 도착하면 입구 양쪽 벽 위로 ‘장영혜 중공업’의 영상설치물 ‘서커돔’(SUCKERDOM: PLEASE COME PLAY WITH ME, BABY/ PLEASE DON’T THANK ME)이 2대의 모니터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작품을 볼 수 있다. 그 바로 아래 구정아의 1,001개 미니멀 드로잉 ‘R’이 프로젝션을 통해 벽으로 영사되고 있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 서도호의 작품 ‘떨어진 별 1/5’(Fallen Star 1/5)를 만나게 된다. 그가 유학생 시절 살던 로드아일랜드의 아파트에 한옥이 낙하산을 타고 날아와 충돌한, 유명한 작품이다. 모든 사물의 실제 사이즈를 1/5로 정확히 계산해 재현한 설치물로, 아파트 내부를 가득 채운 오브제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 전시에 온 보람이 있다. 정교하게 제작된 오브제들은 모두 다 손으로 직접 제작한 것으로 꼬박 2년반이 걸렸다고 한다.
그 옆에는 반투명 재료로 만든 ‘집 속의 집’(Home within a Home)이 있다. 아파트 건물 안에 한옥이 들어 있는 설치물인데 “보는 시각에 따라 한옥이 밖에서 양옥 안으로 들어갔다고 볼 수도 있고, 양옥이 속에서 한옥을 잉태했다고 볼 수도 있는 작품”이라고 서도호는 설명했다. 그는 또 작품의 의미는 사람들이 흔히 해석하는 ‘문화충격’이 아니라 작가의 내부에서 조화를 이뤄온 동양과 서양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집은 의인화된 나의 다른 모습이며, 한국에서 미국에 와서 산 10년의 자서전적 작품”이라고 말했다. 서도호는 또 “1999년 미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카파상 수상전에서 전시한 ‘서울홈/LA홈’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들”이라며 “10년만에 LA에서 다시 집과 관계된 작품을 내놓은 것이 우연이라기보다는 특별한 감회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 눈 부신 조명등 ‘당신의 밝은 미래’
다음 전시실에서 우리는 고 박이소의 표제작 ‘당신의 밝은 미래’를 만나게 된다. 10개의 밝은 조명등이 눈부시게 밝은 빛을 쏘아대는 작품이다. 그 옆에는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LA의 하늘을 실시간 투영해 보여주는 ‘무제’가 있고, 뜻 모를 도시 이름들이 세계지도 가득히 적힌 ‘와이드 월드 와이드’가 걸려 있다. 그의 작품은 너무나 명료하고 정직하다.
전시회 프리뷰에서 만난 크리스틴 스타크만 휴스턴 미술관 큐레이터는 “박이소의 작품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혀 기자를 당황케 했다. 그녀는 “그가 여기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프다. 그는 너무나 훌륭한 작가였으며 여기 모인 11명의 작가들이 모두 그의 이야기를 할 때면 얼마나 그리워하고 존경하는지 모른다”고 박이소를 추모했다.
다음 방에 들어서면 김수자의 6개 채널 비디오작업 ‘바늘여인’이 두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나온다고 하는데 눈물까지는 아니어도 전율이 온 몸을 타고 흐를 만큼 압도적인 작품이다. 지구촌이라는 거대한 천을 꿰매 하나로 감싸고 싶은 여인이 파탄(네팔), 아바나(쿠바), 리오데자네이로(브라질), 엔자메나(차드), 사나아(예멘), 예루살렘(이스라엘) 6개 도시의 복판에 서서 스스로 시공을 가르며 바늘이 되는 장면이 대단히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10분40초.
# 임신한 망치? 유쾌한 김범의 작품들
다음 전시실에는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이미지의 반란들이 기다리고 있다. 김범의 ‘임신한 망치’와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가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내고, 몇 달 걸려서 찍었다는 특별한 작업 ‘무생물 오브제’(Inanimate Objects)를 작은 모니터를 통해 볼 수 있다. 이것은 분해 가능한 재료로 만든 오브제(라디오와 커피포트)를 자연에 방치했을 때 서서히 벌레들에 의해 모든 형태가 와해되고 자연의 부분으로 돌아가는 과정(5분55초)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신문의 식물 사진들만 먹고 자란 화초 2개(A Plant from the Places #1, #2)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작가가 쓴 재미있고 독창적인 픽션북 ‘눈치’(Noonchi)가 한옆에 놓여 있어 누구나 읽어볼 수 있다.
거기서 나오면 박주연의 전시실로 들어서게 된다. 아이리시 강사의 영어 강의를 한국 학생이 더빙한 영상물로 언어의 한계를 표현한 ‘모놀로그 모놀로그’(8분17초)와 폐쇄된 서울역사의 공간적 시간적 간극을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과 주변의 소음으로 표현한 ‘절충적 수사학’(Eclectic Rhetoric)이 상영되고 있다.(13분14초) 그 2개의 작업 사이에는 몇 개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서울역사를 지은 일제시대 건축양식이 비롯된 시대상황과 연관된 1860년대 영국 신문 원본 한 페이지와, 빛과 시간의 노출에 의한 차이를 보여주는 인화지들이다. 이해가 쉽지는 않은데 젊은 작가의 진지한 성찰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 임신한 망치? 유쾌한 김범의 작품들숨은그림찾기 같은 구정아 전시작
그 다음 전시실로 가는 길목에 언뜻 지나치기 쉬운 창고 같은 공간이 나온다. 언제나 뜻하지 않은 곳, 사람들이 무시하고 지나가는 한 구석에 작품을 가져다놓는 구정아의 작품이 슬그머니 거기에도 올라가 있다. 나무 박스 위를 잘 들여다보면 도루코 면도날 껍질들이 잔뜩 쌓여 있다. 구정아는 이 외에도 BCAM 1층에 있는 리처드 세라의 거대한 청동작품 한켠에 ‘산의 근원’(Mountain Fundamental)을 설치하고 있으며 LACMA 건물의 한 외벽에 햇빛에 반사하는 작은 크리스털을 박아놓아 마치 관객과 함께 숨은그림찾기 놀이를 벌이는 듯하다.
구정아를 지나면 바로 옆으로 거대한 20달러 지폐의 영상물을 만나게 된다. 전준호의 ‘백악관’(White House). 아주 작게 보이는 한 남자가 32분16초 동안 백악관의 창문과 문을 모두 페인트 브러시로 지워나가는 모습을 찍은 재미있는 작업이다. 이 작품을 ‘반미’라고 규정하는 사람이 많은데 작가는 아니라고 말했다. “일종의 허무주의, 헛된 꿈, 동상이몽 같은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왜 20달러 지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지폐에 들어가는 이미지는 대중의 공통적 기호와 관심을 반영한다. 나는 대중이 선택한 이미지에 관심이 있다. 백악관 이미지는 거대권력과 세계의 경찰국가라는 상징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백악관을 방문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소통의 상징인 문과 창문을 모두 지워버리면 거대한 콘크리트 성처럼 변해 버린다. 지우는 사람이 아주 열심히,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모습은 개인의 소극적인 저항, 무기력함을 보여주고 있다”
# 블랙홀 같은 암실서 만나는 한국사회
전준호를 지나 어둡고 좁은 통로의 막다른 골목을 돌면 임민욱의 비디오 설치물 ‘잘못된 질문’(Wrong Question)을 만나게 된다.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2개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떻게 하면 부모세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만든 작품”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왼쪽의 영상은 한 택시 운전사의 이야기를 녹취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한국사회를 망쳤다는 투의 편파적인 정치견해는 상실감에 빠진 아버지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오른쪽 이미지는 작가의 일상, 즉 자신의 딸과 할아버지의 간단한 대화를 통해 세대간 소통의 부재를 보여준다. 작품은 마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완전히 검은 방 안에 설치돼 있는데 불안과 혼돈의 한국 정치적 상황을 상징하는 것이다. 임민욱은 “일제시대와 전쟁을 겪은 후 좌와 우,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에 빠져 대결이 심한 한국사회, 아버지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말하고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잘못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라고 설명했다.
# 누워있는 토끼인형 궁금증 유발
좁은 통로를 다시 돌아 나오면 아주 재미있는 전시실로 들어서게 된다. 유머와 재치, 위트와 속임수를 통해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김홍석의 작품들이 2개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11개의 작품을 출품했다. 사람이 들어 있다고 쓰인 ‘토끼의 소파’와 ‘브레멘 타운 뮤지션’ 앞에서는 진짜 사람이 들어 있느냐고 궁금해 하는 관람객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바로 작가의 노림수. 사람은 없다.
작가가 벽에 직접 써놓은 글들을 읽는 재미도 크지만 아이들이 세계 명곡들을 한국말로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담은 ‘세계로의 여행’, 천지연 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포즈를 기록한 ‘제주도’, 총기가 합법화된 한국의 현실을 가상영화로 만든 ‘와일드 코리아’(16분20초) 등이 흥미로운 작업들이다.
김홍석을 지나면 마지막 전시실에 양혜규의 ‘창고 피스’가 있다. 팔리지 않은 작품들을 둘둘 포장해 쌓아둔 스토리지 자체를 작품으로 만든 특별한 팔리지 않는 작품을 계속 만드는 허울 좋은 예술가의 삶, 쌓여가는 작품들을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는 작가들의 고충, 이사할 때마다 포장된 작품을 이리저리 끌고 다녀야 하는 유목민의 삶, 사회 시스템에서 예술작품이란 어떻게, 누구에 의해 그 지위를 획득하는가 등을 다각도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24일 전시회 프리뷰와 28일 오프닝에서는 작가가 고용한 두 명의 배우가 대본에 따라 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는 퍼포먼스가 열리기도 했다.
이제 BCAM 전시장 안에서의 작품은 모두 섭렵했다. 여기서 빠진 작가는 최정화. 그의 3개 작품은 모두 LACMA 밖에 설치돼 있으며 너무도 튀기 때문에 아마도 모든 사람이 전시장을 들어서기 전에 다 보았을 것이다.
아만슨 빌딩 2개 벽을 천으로 둘러싼 ‘웰컴’, BCAM 앞에 설치된 플래스틱 용품들(99센트 스토에서 구입했다고 한다)의 축제 ‘해피해피’, 그리고 6가쪽 펜스에 설치된 또 하나의 ‘해피해피’가 그것이다. 펜스 설치작은 누구든지 플래스틱용품을 들고 와 직접 걸 수 있는 참여작품이므로 라크마에 올 때 자녀들 손에 컵이나 구두주걱이라도 하나 들려오면 재미있을 것이다.
서도호의 작품 ‘집 속의 집’(Home within a Home). 그에게 집은 자서전과 같은 존재다. <박상혁 기자>
전준호의 ‘백악관’. 30분이 넘는 대형 비디오 작품이다.
김홍석의 ‘브레멘 타운 뮤지션’.
# 전시회 일정 및 안내
▲전시일정: 2009년 6월28일~9월20일
▲관람시간: 월·화·목요일 12시~오후 8시
금요일 12시~오후 9시
토·일요일 오전 11시~오후 8시
매주 수요일 휴관
▲입장료: 성인 12달러
어린이(17세 이하) 무료
학생(18세 이상) 8달러
노인(62세 이상) 8달러
▲주소: 905 Wilshire Blvd. LA, CA 90036
▲문의: (323)857-6000 www.lacma.org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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