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중무장한 인민군이 탱크로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 기습공격을 해왔다. 당시 국군은 계속된 경계근무와 공비소탕 등으로 금지한 외출 외박을 농번기를 기해 해제, 전 병력의 3분의 1이 출타중이고, 1주일 전 전방 사단장 및 지휘관들이 대폭 인사이동 되어 전열이 정비되지 못했고, 그나마 전일 토요일에는 육군회관 회식 파티로 전 지휘관이 근무지를 떠난 상태로 비상소집은 지연되고 혼란에 빠졌다.
김일성은 적화통일의 야심을 갖고 1949년에 수차례 스탈린을 방문, 간청했다. 1950년 1월에 반승낙을 받고 4월에는 최종승인을 받아 모택동으로부터도 지원 약속을 받았다. 남침 작전계획은 무정(중국 장성), 박길남(소련), 유성철(소련) 대좌 등이 작성한 것을 소련군 대장 바실리에프 고문관들이 최종검열 후 스탈린의 재가를 받았고 이를 작전국장인 유성철이 번역 하달하고 또한 본인이 4시 공격명령을 내렸다.
소련군 최신탱크 T-34, YAK 전투기, ILS 폭격기, 자주포, 중포 등으로 무장하고 중공군 조선족 병사 2만여 명을 지원받아 12개 사단 20만 병력으로 고요히 잠든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3년1개월에 걸쳐 민족 살륙전쟁을 감행, 500만 명 살상, 1,000만 이산가족과 98%의 산업시설 파괴와 전국토를 초토화시킨 천인공노할 남침을 자행한 거다.
국군은 경무장한 경비대 수준의 무기로 탱크를 선두로 중포로 쏘아대며 공격해오는 저들에게는 상대가 못되고 괴물 T-34탱크 대항에 105mm포, 32.6인치, 로켓포, 57mm 대전차포 등 구식무기는 무용지물이었다. 급기야 27일 오전에는 수도 서울의 최후 방어선인 미아리에 5사단(이응준 준장) 잔여병력과 후퇴해오는 낙오병사를 재편한 3,000명 병력으로 대치, 지뢰설치, 차단벽 조성으로 대비 했다. 인민군은 저녁 7시에 탱크와 중화기를 쏘아대며 공격해 왔으나 아군의 필사적인 응전과 육탄용사 10여 명이 폭탄을 안고 탱크에 돌진하여 3대를 폭파함으로 적은 일시 후퇴한 후 12시에 10대 탱크 자주포 엄호 하에 오토바이 돌격대가 따발총을 쏘며 보병과 협공함으로써 방어선이 붕괴돼 선두의 인민군 105탱크여단, 107연대의 탱크가 미아리를 넘어 시내로 침투했다. 각각 보병 9명씩 태운 탱크는 광화문, 종로로 총을 난사하며 헤집고 다니며 미처 후퇴 못한 군인, 경찰 등을 닥치는 대로 사살하고 경찰서, 형무소를 급습, 죄수들을 석방하고 이들을 무장시켜 낙오병 입초 순경을 학살케 했다.
남산에서는 이용문 대령이 중대를 지휘, 결사 항쟁 후에 전원이 전사하고 이 대령은 자결했다. 미아리에서는 5연대 3대대 백복성 상사 외 9명의 병사가 대기 중인 7대의 탱크에 올라가 수류탄으로 적병을 모두 사살한 후 산화했고, 18연대 강섭탑 소위는 30명의 무장 편의대를 싣고 오는 트럭을 대전차포로 폭파한 후 장렬히 전사했다.
대학병원에서 경비병 30명과 80여 입원 부상병이 전투 끝에 전원 전사하고, 살아있는 중상병과 민간 환자들마저 학살당했다. 세브란스, 적십자 병원에서도 부상병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1시경 인민군 105 탱크여단 30여 대는 한강교 남단에 도착한 후 종대로 정렬, 노획한 무초 미 대사의 승용차로 여단장 유경수 대좌 및 휘하 참모들에게 승전축하 사열을 했다.
한강교는 애초 4시 폭파 계획이었으나 다급해 예하 전선 부대에 사전 통보 없이 채병덕 육군총장이 2시에 폭파명령을 내려 2시10분경에 폭파되었고, 후퇴 중인 3개 사단의 사단장들이 육본에 도착, 조기폭파 사실을 듣고 재차 폭파지연을 건의했고, 이를 시행코자 한강 현장으로 달려간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피난민 대열로 길이 막혀 간신히 도착하니 이미 폭파한 후라 망연자실했다. 폭파로 인해 그 시간 인도교 통과 중이던 500여 국군과 피난민이 폭사하고 300여 대의 군 차량, 화포 등이 파괴되는 전대미문의 참사로 6,25 전사상 최악의 오점을 남겼다. 이로 인하여 한강 이북에서 후퇴 중이던 4개 사단의 3만여 병력은 분산 후 광장교, 팔당, 양수리를 통해 도강함으로써 귀중한 차량, 중장비, 야포 등 1,318대를 포기해 인민군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용감한 6사단(김종오 준장)은 28일 오후까지 춘천을 사수했으나 서울 함락으로 부득이 홍천으로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모든 장비를 보유한 유일한 사단으로 차기 전투에서도 승전했다.
인민군은 중동부의 진격 지연으로 작전에 막대한 차질을 빚고 주력 서울 입성 부대가 한강에서 3일 동안을 대기, 저들의 적화통일 호기를 놓침으로써 한국전쟁의 운명이 달라진 것이요, 미군 참전의 시간을 줌으로써 낙동강 패전을 자초한 것이다.
6.25 전쟁은 끝난 게 아니고 정전 휴전상태다. 김정일은 핵과 미사일로 협박을 하고 UN에 도전하며 전쟁위협을 하고 있다. 적화통일에 광분하는 저들의 계략을 분쇄하고 자주민주 통일의 깃발 아래 단결하여 조국 통일의 길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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