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CMA 한국현대작가전’ 기획 김 선 정 큐레이터
흰 셔츠에 청바지 운동화, 꾸밈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수수하고 맑은 얼굴, 조용하고 단아한 이 작은 여인이 한국 현대미술계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최고 파워라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사실은 글머리에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그가 밝히지 말아달라고 해서 주춤했던, 그러나 결국은 이렇게 쓰고야 말게 되는 그녀의 배경,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외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의 지극히 평범하고 겸손한 모습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안 화려함’은 정말 의외였다는 말이다. 김선정(44)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미술기획사 ‘사무소’의 대표이며 독립 큐레이터로서 지난 15년간 한국의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는데 독보적인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녀는 오는 28일 시작되는 LA카운티 뮤지엄 ‘한국현대작가 12인전: 당신의 밝은 미래’를 지난 4년간 한국 쪽에서 기획해 온 숨은 공로자로, 휴스턴미술관의 크리스틴 스타크만 큐레이터와 LACMA의 린 젤레반스키 큐레이터와 함께 이 전시회를 만들었다. 개막을 2주 앞두고 작품 설치와 제반 준비를 위해 LA에 온 그녀를 12일 미술관 마당에서 인터뷰했다.
글로벌 시대 작가의 문제의식에 초점
기획단계부터 작가들 심도 깊게 참여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품 전시
‘한국 측 큐레이터로서 맡았던 역할’에 대해 묻자 김선정은 곧바로 “‘한국측’이라는 단어는 쓸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교정해 온다. 요즘의 현대미술은 국가간 장르간 경계가 없어져가는 추세인데, 굳이 그런 제한적인 수식어가 필요한가 하는 지적이다.
바로 그것이 이번 전시의 테마이며 내용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경계의 허물어짐과 언어의 번역 및 소통의 문제, 즉 국제화 시대에 작가들이 부딪치는 고민과 문제의식을 반영한 전시다.
“90년대 이후 급격히 국제화된 한국사회 이면의 문제들을 보는 작가의 생각, 변화의 시대에 예술가로서의 발언이 담긴 작품들입니다. 또한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졌는데 그들이 체험한 언어와 소통 문제가 많이 다뤄졌지요”
김 교수에 따르면 이번 전시의 작가 선정과 작품 선정은 큐레이터들의 수없이 많은 스튜디오 방문과 작가들과의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보통 기획전이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을 갖고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번 전시는 5년이라는 시간이 투자된 만큼 작가들과 심도 깊은 협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이란 게 이미 만들어진 작품들을 골라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단계에서부터 작가가 참여하고 주제에 맞춰 새로 작업하거나 전시장에 맞춘(site-specific) 프로덕션을 선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국미술을 소개하는 해외전시는 우리가 보여주고 싶은 것보다 현지 관람객들이 관심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전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이번 전시도 미국이라는 현장과 담론에 맞는, 글로벌 시대의 언어와 번역이라는 컨셉에 익숙한 작가들이 주로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전시회 제목을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Lost in Translation·영화 제목)으로 정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을 만큼 소통의 주제를 비중 있게 다뤘다는 것이다. 고 박이소의 유작 ‘당신의 밝은 미래’가 제목으로 낙점된 것은 한국 작가들이 과거보다는 미래지향적이며 역동적으로 작업한다는 점, 또 국제 미술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점에서 채택됐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 미술은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중국미술에 비해 인정받지 못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작품이 처음으로 미 주류 뮤지엄에서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이번 전시에 대해 한국 미술계가 갖는 기대는 대단하다.
“한국은 ‘보물섬’이에요. 숨어 있는 보물 같은 작가들이 너무나 많은데 국제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말이죠. 80년대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국가전을 만들어 미국을 순회했고,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는 중국전이 돌아다녔지만 한국 미술은 노출되지 않았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해외 큐레이터들도 같은 의견이에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 교수는 한국 작가들이 다른 나라 작가들에 비해 깊이 있고 복잡하며 여러 겹의 층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가 복잡하기 때문으로, 짧은 시간동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한 국제사회에서 많은 변화를 겪어온 탓에 그 내용과 표현이 훨씬 심도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사회에서 작가란 어떤 존재일까?
“양파깡 포장지 속의 공기와 같은 존재이지요. 양파깡은 포장지에 공기를 잔뜩 넣어서 과자가 안 부서지게 만들잖아요. 그 공기는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 없기도 하죠. 중요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걸 얘기하는 사람, 현장에서 빠져나와 바라보면서 접혀진 역사 속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작품이 너무 개념적이고 실험적이라 어렵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 전시는 작품만 보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철학적 개념적 내용을 알아야 되요. 그러니까 공부한 만큼 보이는 거죠. 영화 ‘매트릭스’처럼 스토리 안에 철학도 있고 신학도 있고 공상과학도 있지만 장르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직접 작품을 보면 오히려 쉽게 이해되는 것이 또한 현대미술이기도 해요” 그게 무슨 말인지는 직접 전시장에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예술종합대학 미술원 교수
이불·김수자 등 월드스타 발굴
▲ 김선정 큐레이터는
이화여대 서양화과와 미국 크랜브룩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 백남준의 주선으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큐레이터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어머니 정희자씨가 설립한 아트선재센터 부관장과 영국 테이트미술관 자문위원, 2005년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아트선재센터를 한국현대미술의 전진기지로 이불 김수자 서도호 배병우 오형근 김홍석 등 지금은 월드스타가 된 작가를 발굴해 국내외에 소개했으며, 경복궁 앞 기무사 터, 낡은 한옥, 주차장 같은 곳에서 영화, 음악, 공연 등 다른 장르와 협업하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난해하기 쉬운 현대미술을 참신하고 흥미진진하게 선보이는 일을 해왔다. 2000년 강익중, 서도호, 바이런 김, 마이클 주, 김수진 등 미국의 한국 작가들을 조명한 ‘코리아아메리카코리아’전을 성공적으로 유치했고, 2006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 아르코아트페어 한국관 커미셔너로 발탁됐지만 정부가 기획과 작가 선정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중도 사퇴했을 만큼 소신이 뚜렷한 큐레이터로 지난 15년간 한국 문화예술계에 깊고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큐레이팅과 미술관학 박물관학을 가르치면서 미술기획사 ‘사무소’(SAMUSO)를 이끌고 있다. 월간 미술대상(2002년), 프랑스정부 문예훈장(2003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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