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한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회사원 미스터 김은 결혼한지 20년이 지나면서 매일 쳇바퀴 돌듯 하는 생활에 가끔 짜증이 났다. 오늘은 일요일. 늦잠을 자는데 아내는 방에 걸레질을 하고 있었고, 허름한 그녀의 바지와 들썩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도 못마땅해보였다. 거기다 점심때가 되어서 양푼에 고추장과 김치를 넣고 쓱쓱 비비더니 자기에게 한 그릇을 덥석 퍼주고, 힘든 듯 한쪽 다리는 다른 의자에 올려놓고 양푼 채 들고 밥을 먹는 폼도 맘에 안 들었다.
그날 그는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서는데 아내의 말이 뒤통수를 친다. “언제 들어오는데?” “글쎄, 나가봐야지.” 야심한 시각, 조심조심 발을 들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자는 줄 알았던 아내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데…” “어, 친구들 만나서…그런데 어디 아파?” “응, 조금…낮에 비빔밥 먹은 것이 얹혔는지 너무 아파서 당신 들어오면 약 좀 사오라고 여러 번 전화 했었는데…” “어, 배터리가 떨어졌었어. 어디 당신 손 이리 내봐.” 벌써 여러 번 혼자서 땄는지 아내의 손끝은 상처투성이였다. 갑자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내를 등에 업고 응급실로 갔다. 그때쯤 정신이 든 아내는 응급실은 원래 비싼 곳이라고 하면서 좀 나았다며 집으로 가자고 했다.
며칠 후 추석날에는 이번만 자기는 친정집에 갈 테니 남편보고 예전처럼 시어머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라고 얘기한다. 그는 “아픈데 장모님이 보면 걱정하실 텐데…”라고 하니 마치 고양이 쥐 생각 하냐는 얼굴로 쳐다본다. 아내는 별다른 말도 없이 훌쩍 장모님 집에 가고, 결혼 후 처음으로 혼자 그는 어머니를 뵈러 시골에 갔다. 어머니는 세상 천지에 며느리가 그러는 법은 없다고 호통을 치셨다.
며칠 후 집에 돌아온 아내는 아무 일 없었던 사람처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보, 만약 내가 없어져도 당신이나 애들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겠지? 사실은 나 친정에 가있었던 것 아니야. 병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았어. 당신이 혹시라도 전화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무정한 사람, 그 며칠 동안 전화 한 통이 없어.”
아내의 병이 가벼운 위염이 아니고 위암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하늘이 갑자기 노래지는 것 같았다. 결혼하고 나서부터 이제까지 여행 한 번 간 적 없고 그저 자기와 아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사람이 아니던가.
서울에서 공부하는 두 애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아내, 아이들한테는 아무 말 말라고 했다. 바쁜데 불쑥 찾아온 부모가 별로 반갑지 않은 듯 해도, 아내는 하고 싶은 얘기를 이어갔다. 공부는… 건강은… 사람은… 잘해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코스모스가 많은 곳에서 걷고 싶다는 아내. 비싼 것 사고 또 맛있는 것 먹는 것보다 자기는 이렇게 아이들 만나보고, 코스모스 길을 당신과 함께 걷고 싶었다고…
아내가 입을 열었다. “여보, 병원에서 운이 좋으면 몇 달은 살 수 있을 거라고 하네요. 우리 올해 말에 타는 적금 있는 것은 알지?” “응” “그리고 내가 따로 3년 동안 부은 적금 통장이 있는데, 싱크대 서랍에 있어. 아이들이 대학 졸업하면 결혼도 해야 하고 돈이 많이 필요할거야. 그리고 작년에 친구가 하도 졸라서 내 생명보험을 하나 들었거든. 공교롭게도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그리고 여보, 부탁 하나만 할께. 우리 엄마가 이가 안 좋으셔서 음식을 잘 잡수시지 못하니 적금을 타면 엄마 틀니를 하시게 돈을 좀 드려.” 아내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언제나처럼 남편과 아이들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내를 위해 진심으로 무엇을 했던가. 미안한 마음에 그의 눈시울이 젖었다. 그리고 그녀가 없는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나 생각만 해도 앞이 캄캄했다. “여보, 30년 전에 우리 결혼할 때 그때는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는데, 그 이후에는 한 번도 안했던 거 알아?” “뭐, 새삼 쑥스럽게… 알았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그는 아내를 깨웠다. “여보, 일어나. 우리 적금 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장모님 틀니 하시라고 돈 드리고 옵시다.” 그런데 좋아하며 일어나야할 아내가 꿈쩍도 않는다. 소스라쳐 놀란 그가 아내를 흔들어 깨웠지만 아내는 반응이 없다. 아내 위로 무너지듯 쓰러진다. “여보, 사랑해. 그런데 내가 왜 어제 밤에 이 소리를 못했지? 사랑해. 정말 사랑해, 여보.” 잠든 듯 평화로운 아내의 얼굴 위로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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