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미국 이상주의 실현 추진
교사 출신 존슨은 교육개혁 집중
Harry Truman(1945-1953) 33대 대통령은 부통령 취임 후 3개월 만에 1945년 4월, Roosevelt(FDR)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대통령이 된 후에, 부통령 없이 대통령 임무를 수행했다.
1945년 6월, 전임 Roosevelt 대통령이 시작한 세계 평화를 위한 ‘유엔헌장’에 서명했고, 1945년 7월 26일에는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함께 ‘포츠담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일본에게 보내었다. 그러나 히로히토 일본 천황이 이를 수용치 않자, 미국이 1945년 8월6일에는 히로시마에, 8월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 결과 한국이 36년 동안의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 점을 감안할 때에 대한민국의 8.15 해방을 간접적으로 도운 대통령이었다. 갑작스런 취임으로 초기에는 “하늘의 달과 별 등, 천체 전부가 내 위에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했었으나, 곧 Roosevelt 대통령이 처음 실시한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했다. 이후 ‘완전 고용 프로그램’과 오늘날 ‘Fair Deal’로 불리는 ‘공정한 고용정책’을 실시, 자신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또한 국제 정치면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947년, 소련이 터키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리스를 접수하려하자 미연방의회로 하여금 터키와 그리스를 원조할 것을 촉구했으며, 후에 이 정책이 트루만 주의(Truman Doctrine)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2차 대전 후 독일 재건을 위한 Marshal Plan을 시행, 전후 독일의 경제적인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또 소련이 서 베를린인들의 생활을 교란하자 군사동맹을 위한 북대서양기구(NATO)를 결성했다.
특히 1950년 6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자 유엔군과 미군의 즉각 투입을 주도했다. 그러나 중국, 소련과의 대규모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한국동란을 국지전화 시키는 정책을 폈다.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장군이 백두산까지 미군을 끌고 올라갔으나 후퇴하게 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 결과 한국은 아직도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다.
34대 Dwight D. Eisenhower 대통령(1953-1961)은 대통령이 되기 전, 세계 제2차 대전동안 혁혁한 수훈을 세웠던 프랑스 점령군의 총사령관, 신설된 NATO군의 최고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한국 전쟁을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지웠다.
Stalin의 사망과 함께 임기동안 줄곧 동서냉전의 완화에 힘썼다. 1950년대 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한국을 방문했다. 내정 면에서는 Roosevelt 대통령의 New Deal 정책과 트루만 대통령의 Fair Deal 정책을 유지했다. 1954년의 Brown v. Topeka, Kansas의 연방법원의 판시에 따라 공립학교와 미군의 흑백통합 정책을 펴 나갔다.
35대 John F. Kennedy(1961-1963) 대통령은 미역사상 최초의 Irish계, 가톨릭계 대통령이었다. 또한 미국 역사상 최연소(44세)의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돼 대통령으로서는 최연소의 나이(46세)에 사망했다. 하버드 출신으로, ‘용기의 측면’이란 논문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연방하원의원을 거쳐 상원의원을 지냈다.
취임사에서 “국가가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묻는 대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라”고 주문했다. 집권 1,000일 동안 경제정책으로는 결핍과 가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과 지속적인 경제팽창을 꾀했으며, 평등권과 민권법 제정에 노력을 기울였다. Kennedy는 생동력 있는 미국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미국문화의 질과 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소련이 미국의 턱밑인 Cuba에 미사일을 설치하려하자 Cuba행의 모든 군수물자 수송선의 해상검역을 실시도록 지시, 사실상 소련의 미사일 설치를 봉쇄했다.
이를 기회로 Kennedy는 핵확산을 막는 것이 동서진영에 다같이 이로울 뿐 아니라 세계 평화질서에 이롭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의 노력으로 1963년 핵무기 시험 금지 조약을 체결했다. 이와 같이 Kennedy는 대내적으로는 미국인들의 평등권과 대외적으로는 세계평화의 서장을 연 대통령이었다.
36대 Lyndon B. Johnson(1963-1969) 대통령은 중부 텍사스의 목장에서 태어나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 자랐기 때문에 덜 가진 자에 대한 배려가 컸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직 교사 출신 대통령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일 년간 가난과 궁핍에 찌든 멕시칸 초등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로 인해 동정과 연민을 배웠다고 한다. 1963년 11월 Kennedy 대통령이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하자 Johnson이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이듬해에 Kennedy대통령의 유산인 ‘민권법안’(1964년)을 통과시켰다.
재임동안 줄곧 가난한 자와 노약자들을 위하여 무려 200개의 크고 작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에는 ‘초·중등교육법’을 통과시켰고, 1968년에는 ‘이중언어 교육법’을 통과시켜 갓 이민 온 학생들과 저소득층 학생들을 위한 특별재정 지원을 단행했다. 가난에 대한 무조건적인 전쟁을 시작, 질병과 범죄를 근절하고, 1965년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케어법’을 통과시켜 시행했으며,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Head Start’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그의 재임 시인 1968년 미국은 최초로 우주 탐사 위성을 발사했다.
이처럼 큰 족적을 남긴 대통령들을 위해, 매년 2월 3째 월요일에 ‘대통령의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클라라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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