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풍차방앗간에서 가난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렘브란트에게 풍차는 요람과 같은 것이었다. 바람이 불어와 풍차의 날개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마다 방앗간 안은 빛과 그림자들이 번갈아가며 춤을 추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그 빛과 그림자의 이미지는 훗날 그의 그림에 절묘한 명암으로 표현되고 그를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 불리는 세계적 미술의 거장으로 키운다.
누구에게나 유년기를 보낸 집이 있다. 대체로 그 집은 남루했고 또 따뜻했으며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내 유년기를 보낸 집은 할아버지께서 혼인하시면서 직접 지으신 집이었다. 방이 두 칸씩이었던 안채와 사랑채엔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과 볕이 고왔다.
물려받은 집은 함부로 해도 손수 지은 집은 아까워 문지방도 베고 눕지 않는다는 옛말처럼 할아버지는 그 집을 무척 아끼셨다. 농사일이 끝나고 나면 흙손을 들고 굴뚝 모캥이며 낮아진 토방 여기저기를 보수하셨다.
앞산의 풍경을 반쯤 걸치고 분홍 장미가 얽혀 피던 돌담도 심한 장마가 지나가면 배를 불룩 내민 채 할아버지의 손길을 기다렸다. 지금은 빈 집이 되어 방고래가 꺼지고 부엌엔 풀만 무성한 채 서늘히 문 닫고 있지만 내 마음 속의 그 집엔 언제나 알맞게 덥혀진 구들이 있고 덩쿨장미의 향기가 돌담을 넘는다.
내 기억 속의 두 번째 집은 읍내에 있는 작은 기와집이다. 그 집을 기억하면 어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산길에서 남 몰래 만나는 쓸쓸한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시골집엔 도회지에 사시는 작은아버지들의 몫까지 꽤 많은 농사채가 있었다. 교사셨던 아버지의 월급은 농사비용으로 스며들면 그뿐이었고 다섯 자식들 가르치실 일이 걱정되신 어머니는 할머니 몰래 쌀계를 드셨다. 외가와 친가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찻길은 에둘러 멀리 돌아가야 했고 지름길인 산길은 험했다. 시집간 딸의 곗돈을 모아주기 위해 외할아버지는 몇 달에 한 번씩 그 험한 산등성이들을 넘어오셨다.
외할아버지와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 되면 어머니는 할머니 몰래 산밭으로 올라가셨다. 산밭을 지나 다랑논둑길을 걸어가다 보면 상여집이 나왔다. 싸리꽃 몇 가지가 기대어 피기도 하던 상여집을 지나 풀숲길을 조금 올라가면 허리 굽은 늙은 소나무가 서있는 곳이 두 분의 약속장소였다.
전화도, 일기예보도, 손목시계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몇 달 차곡이 모은 돈봉투를 가슴에 품고 산길을 오르려면 산새 한마리만 포릉 날아가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외할아버지는 세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야 했지만 늘 먼저 도착해 계셨다.
어머니는 그리웠던 친정아버지의 손에 봉투를 맡기고 다음 약속날짜를 정한 뒤, 바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돌아서는 딸의 손에 외할머니가 싸보내신 쑥버무리나 수수부꾸미 같은 걸 들려주셨다. 그리고 딸의 뒷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오래 서계시곤 하셨다.
저녁밥이 늦어질까, 친정아버지 돌아가시는 산길에 어둠이 빨리 내릴까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는 어머니의 치마 끝을 찔레꽃가지나 가시덤불이 잡아당겼다. 외할아버지는 딸이 지나다닐 산밭 근처의 길에 수북한 가시덩쿨과 잔 나뭇가지들에 낫질을 하시기도 했다. 그런 날은 해가 뉘엿해져서야 산등성이를 향해 발길을 돌리셨다. 저녁쌀 씻는 샘가에서 올려다보는 뒷산 마루에 노을이 지면 어머니는 어두워지는 산길을 가시고 계실지도 모르는 친정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났다. 숯불처럼 타는 저녁노을 너머 친정집이 그리워 어머니의 마음도 노을 따라 산을 넘었다.
읍내의 그 빨간 기와집엔 방이 세 칸이었지만 한 칸은 항상 손님들 몫이었다. 친척 고등학생들이 하숙을 하기도 했고 시골에서 오신 손님들이 묵어가기도 했다. 우리 형제들은 하나 남은 방을 나눠 써야 했다. 중학생이 된 나는 한 이불을 덮는 동생이 귀찮아서 이불에 팔뚝금을 그으면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우리 형제들이 비좁다고 툭탁거릴 때마다 어머니는 혼잣소리처럼 이야기하시곤 했다. “그리운 날이 온단다. 너희들 다 모여 하룻밤만 같이 자보는 게 꿈이 되는 날이 온단다.”
시골집에서는 온종일 둔덕이나 고샅에서 노느라 밥 먹을 때와 잠잘 때만 집으로 찾아들던 두 살 아래 남동생과 나는 같은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방을 나눠 쓰다가 훗날 서울살이도 같이 했다. 게처럼 옆걸음을 쳐야 돌아 들어갈 수 있었던 방, 걸어놓은 옷이 팔락거릴만큼 웃풍 세던 방, 걸핏하면 하얗게 식어버리던 연탄아궁이, 동생은 서울을 싫어했다.
방 한칸을 책장으로 나눠 쓰며 찬 웃목 쪽에서 잠들던 동생이 가엾었다.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 푸덕푸덕 찬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새벽잠을 쫓은 동생은 삐이걱- 아무리 조심해도 높은 소리가 나던 자취집의 양철대문을 열고 나가곤 했다. 학교 도서관을 향해 가는 동생의 발자국이 골목 끝으로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누우면 이유 없는 서러움이 목에 걸리기도 했다. 서
울은 쉬이 정들여지지 않았다. 깃들여 살아지지 않았다. 동생은 그렇게 싫다던 서울살이에 어찌어찌 정이 들었던지 서울의 제법 번잡한 자리에 치과를 개업했고 지금은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있다. 가끔 한국으로 늦은 밤시각, 살짝 취기가 오른 목소리의 그 동생이 전화를 걸어올 때가 있다. 탱자나무 가시에 무궁화꽃을 끼워 만든 바람개비를 내게 내밀 때처럼 불쑥, 전화를 건 동생은 또 별 할 말도 없이 전화를 끊는다. 동생의 전화 한 통은 내 가슴에 아직 시들지 않은 꽃바람개비를 돌려준다. 그런 밤, 동생도 어머니의 혼잣소리처럼 형제가 다시는 같이 잠들 수 없었던 비좁은 방의 기억을 하며 잠이 들 것이다.
렘브란트가 유년의 집에서 빛과 어둠의 조화를 얻었다면 나는 그 유년의 집에서 삶의 순리, 혹은 기다림 같은 걸 배웠다.
어릴적 살던 그 집, 그 산천에서 보았던 꽃들은 옅은 색부터 피기 시작해 짙은 색으로 변하며 계절이 갔다. 어두움이 내리면 새들이 우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뱁새 박새 굴뚝새 같은 작은 새들이 집 가까이에서 울기 시작했고 어둠이 짙어지면서 까치나 산비둘기 소쩍새 같은 산새들이 울기 시작했다. 내 정서 깊숙이 잠재해 있던 그 풍경들은 가파른 삶을 에둘러 돌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낮은 하늘은 낮게 높은 하늘은 높게 날아가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 집에 가고 싶다. 날마다의 걸레질로 순박한 윤기를 내던 대청마루의 살림은 쌀뒤주 하나가 전부였다. 뒤란으로 감꽃들이 아름다운 선을 그으며 떨어지기도 했던 그 집은 바흐의 무반주첼로조곡을 닮았다.
다른 악기의 반주가 없어도 가슴 밑바닥에 낮게 깔리는 감동이 있는 그 곡처럼 살면서 기억하는 그 집은 내 가슴에 긴 울림을 준다. 비어 있으나 모자람이 없었던, 고운 볕과 풍경을 통째로 품을 줄 알았던 그 집에는 공간의 미학이 있었다. 삶의 미학이 있었다. 때때로 생각하는 그 집은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고, 들여놓고, 쓸데없는 것을 쫓아 바쁜 내 일상에 숨을 고르게 한다. 비울 수 있는 자만이 채울 수 있다는 가르침 같은 걸 준다.
훗날 내 아이들이 기억하는 유년의 집은 어떤 기억들이 살고 있을까.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바흐를 들어야겠다. 하마터면 고서점의 먼지에 덮여 사라질 뻔했던 바흐의 악보를 찾아내 170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해준 카잘스를 기억하며 무반주첼로곡을 들어봐야겠다.
마냥 바쁘기만 하던 엄마가 어느 한 저녁 틀어 놓았던 무반주첼로곡을 어설피 기억할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볼륨을 한껏 올려봐야겠다. 어느 해 봄이던가 대문간에 피어 있던 복사꽃을 발견하시고 “어마, 꽃 폈네.” 짧게 감탄하시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늦은 저녁 빨래를 걷어들여 오시다가 마당에 깔린 달빛을 보시고 “달도 참 고옵다-” 하시던 어머니의 나즈막한 감탄사가 가끔 생각난다.
내겐 처음처럼, 그리고 생경스럽게까지 들렸던 어머니의 감탄사…. 억척스런 생활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어머니에게서 훔쳐본 어머니의 감성은 낯설었지만 따뜻한 감동이었다. 혹은 따뜻한 슬픔이었다. 바흐의 무반주첼로곡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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