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많이 재학하고 있고 한국 목사들이 가장 많이 유학한 학교로도 유명한 풀러신학교의 리처드 마우 총장은 저명한 복음주의 신학자이다. 마우 총장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한국 유학생이 “가족 장례식 때 불교도인 가족이 향을 피우려해 난처한 적이 있었는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토로해 와 가족 간의 종교적 공존에 대해 오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밝혔다.
마우 총장은 “이런 예식뿐 아니라 가족이 모일 때 종교가 다르다고 해 참석을 하지 않아 다른 가족을 화나게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가족들이 나름대로 기도하게한 후 기독교의 기도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며 사도 바울의 예를 들었다.
바울은 이교도에 대해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종교성과 영성을 인정하면서 대화에 나서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마우 총장의 설명이다. 바울의 예화를 든 그가 인터뷰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식의 전도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고 털어 놓은 것은 당연하다.
나와 다른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이 그릇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나와 다른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독선이 완고하고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런 독선이 가장 극렬하면서 배타적인 방식으로 표출되는 영역이 종교이다. 내가 믿는 것만이 절대적인 선이라는 의식이 자리 잡는 순간 나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은 설자리가 좁아진다.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올바른 사람이 되고 조화로움과 평화 속에 더불어 사는 삶일 터. 그런데도 정작 역사 속에서 종교는 “단 한 번도 자기들이 주장하고 가르치는 이념을 실천한 적이 없었다”는, 한 저명한 비교 종교학자의 질책은 뼈아프다.
얼마 전 한국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18%였던 반면 불신 응답은 48%에 달했다. 30%가 넘는 신뢰 응답을 받은 가톨릭, 그리고 불교와 대조적이었다.
개신교에 대한 불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언행 불일치’와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부족’이 그것이다. 배타성에서는 기독교가 단연 다른 종교들을 앞선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간다”며 독선을 고집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런 태도는 아무리 좋게 봐도 종교적이지 않다.
몇 년 전 이슬람을 모독하는 듯한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중동순방길에 나서 종교 간의 화합과 이해를 촉구했다. 교황은 “화합의 디딤돌이어야 할 종교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목적 등으로 대립과 분열을 일으키고 있으며 상대를 존중하지 않은 채 자신의 종교를 강제하려 한다”고 개탄했다. 다른 종교에 열려 있던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와 달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던 교황으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입장표명이다.
그런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도 다음 달 이집트에서 무슬림 권에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연설을 할 예정으로 있다. ‘신념의 덫’에 걸려 있던 부시가 8년 동안 고집해 온 일방주의가 퇴조하면서 세계는 조금씩 서로간의 차이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지고 이해하려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유대교 랍비인 조너던 색스는 지난 2004년 자신에게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그라베마이어상을 안겨준 한 저서에서 “논쟁에서는 한쪽이 승리하고 다른 쪽은 패배하지만 둘 다 애초의 의견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화는 어느 쪽도 패배하지 않지만 양쪽 다 변화한다”며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을 지적한 바 있다.
이 책은 ‘차이의 존중’이라는 한국어 제목으로도 출간됐는데 원제는 ‘Dignity of Difference’이다. 직역하면 ‘차이의 존엄’이다. 존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소극적 의미가 강하지만 존엄은 “그렇기 때문에”라는 적극적 의미가 더 강하다. 다르지만 좋은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좋다는 것이다.
종교들 간에도 대화의 싹이 트는데 이런 분위기는 아랑곳 않은 채 날이 갈수록 더 대립과 외곬로 치닫는 곳이 있으니 바로 대한민국의 이념 싸움터이다. 같은 색의 언론을 등에 업고 자기들만의 프레임에 갇혀 싸우는 양상을 보노라면 차이의 존엄은커녕 존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해진다.
국제사회에서는 공존을 외치면서도 정작 같은 국민들끼리는 대화라는 21세기 패러다임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