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 중에 잊혀질만하면 다시 기억되는 인물이 있다. 니콜라이 콘드라티에프가 그 사람이다. 레닌이 정권을 잡은 뒤 망가진 러시아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제한적으로 시장 경제를 허용한 소위 ‘신 경제’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그는 나중에 스탈린에 의해 ‘인민의 적’으로 몰려 오랜 수용소 생활을 하다 1938년 46세의 나이로 처형되고 만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스탈린 만행의 억울한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콘드라티에프 사이클’의 발명자로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단기간의 경기 사이클뿐만 아니라 40년에서 60년 주기로 움직이는 장기 사이클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창조적 파괴’로 유명한 슘페터에 의해 소개돼 널리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그의 명성은 경기 사이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80년대와 90년대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호황이 계속되면 그의 이름은 빛을 잃는다. 반면 ‘콘드라티에프 사이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이클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그러다가 지난 2007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와 같이 세계적인 불황이 찾아오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사이클은 ‘경기의 4계절’로 불리기도 한다. 첫 단계인 ‘봄’에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도입되고 생산성이 향상되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풍요를 맛본다. 두 번째인 ‘여름’에는 경제는 성장하지만 물가가 오르고 생산성이 둔화된다. 세 번째 ‘가을’에는 물가가 내려가고 실업자가 늘며 고립주의가 강화된다. 네 번째 ‘겨울’에는 은행이 도산하면서 기업의 돈줄이 막히고 금융 시장이 붕괴되며 국제전이 발생한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지는 그의 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뚜렷한 답이 없다. 단지 두 세대 간격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놓고 한 세대가 경험한 것을 다음 세대가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새로운 사이클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1990년대 말 전 세계가 하이텍 붐으로 들떠 있을 때 콘드라티에프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 경제와 경기 사이클의 종언’ ‘영원한 호황의 고원’ 등등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30년대의 대공황 후 꼭 60년이 지나 한 사이클이 마무리되는 시기가 바로 그 때였던 셈이다.
2000년 주식 버블이 터지면서 전 세계가 디플레와 불황에 빠질 조짐을 보자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는 단기 금리를 1%선으로 내려 해결해보려 했다. 그러나 이는 부동산 광풍을 불러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게 요즘 나오는 분석이다. 그 때 부실기업 정리를 시장에 맡겨두었더라면 지금 같은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으리란 얘기다.
지금의 경기 침체가 2000년 하이텍 버블 붕괴의 연장선에 있고 이것이 콘드라티에프 사이클의 ‘겨울’ 단계라면 ‘봄’이 찾아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다우존스 산업 지수가 1929년의 정점을 회복하는 데는 24년, 1966년의 정점을 회복하는 데는 16년이 걸렸다.
이 달 들어 다우 지수가 8,500선을 회복하면서 경기 회복이 임박했다는 희망적인 전망이 쏟아지고 있다. 불과 두 달 전 다우가 6,500대를 헤매고 있을 때 암울하기만 하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조지 소로스와 누리엘 루비니, 게리 쉴링 등 이번 금융 위기를 정확히 예견했던 비관론자들마저도 조심스런 낙관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불과 수년 사이 연달아 찾아온 하이텍과 부동산 버블은 그 세계적인 규모로 봐 ‘콘드라티에프적 사건’이다. 그리 단기간에 간단히 해결되리라 믿는 것은 역사의 긴 흐름을 잘못 읽는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좋은 시절이 반드시 돌아오겠지만 그러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
최근 한국 20대 기업 임원들을 상대로 조사를 해 본 결과 경기 회복이 V자형을 이룰 것으로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U형이나 L형으로 전망한 사람이 20%, 느리디 느린 바나나형이 될 것으로 본 사람이 60%를 차지했다. 이번만은 한국 기업인들이 사태를 제대로 본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