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키우기
1939년 정월원단, 유주
1939년의 첫날. 이곳 유주의 일기는 명랑치 못하다. 오늘로 제시가 세상에 태어난 지도 햇수로 한 고개를 넘어서게 됐다. 무사히 잘 자라기만 기도드릴 뿐이다.
1939년 1월16일 유주
약 2주나 특별히 주의하여 본 결과 제시의 표현법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시장하여 먹고 싶은 때는 눈물을 흘려가며 엉엉 울고, 안아달라는 것은 허리와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눈물도 흘리지 아니하고 ‘에에’ 소리를 낸다. 벌써 전부터 깨어있을 때는 물론이고 잘 때에도 이불을 얼굴에까지 덮어주면 두 팔을 뻗쳐 치워버린다. 많은 발전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큰 웃음과 높은 소리를 지르며 하루 종일 잘 놀고 있다. 요즘엔 하루하루 아이의 기분이 엄마 아빠의 기분까지 좌우하고 있다.
1939년 1월24일 유주
우리의 생활은 아기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낯선 땅, 낯선 시간 속에서 침울한 바깥 정세에 의해 오락가락해야 하는 풍전등화 같은 처지지만 아기는 바깥 세계와 무관한 듯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먹고 배설하고 제 몸을 관찰하고 시험해보고 안 좋은 자극이 오면 그대로 반응한다. 이 시간, 이 땅에서 아버지가 아기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가정이란 보금자리에서 따뜻한 관심과 가슴으로 그저 아이를 지켜주는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선택을 물려주며 어쩔 수 없으니 감수하라고 할 것인가? 아이가 훗날 이국을 떠돌면서 생활했던 이유를 묻는다면 ‘너의 미래를 위해서였다’는 짧은 한마디로 이해시킬 수 있을까? 그것으로 독립성취라는 간절한 우리의 소원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것으로 우리 가족의 이 시간을 담아내고도 남을까?
1939년 2월2일 유주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비는 점심때까지 그칠 줄을 모르다가 하오가 되어서야 갑작스럽게 햇볕이 내리비치자 제시 아가도 기분이 상쾌해지는지 잘 놀고 있다. 무엇인가 장난감을 찾는 눈치여서 4인치쯤 되는 분홍색 헝겊 조각을 주었더니 받아들고 유심히 보고 만지고 입에 넣어보면서 재미있게 잘 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한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채워줘야 할까! 가진 것보다 가지지 않은 것이 더 많은, 태어난 지 일곱 달 된 아기가 갖고 있는 그 빈자리가 놀랍고 조심스럽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 더 크고 넓은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심어주고 싶다. 부모인 내가 갖기 못한 것이 그곳에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저 부모 된 이의 욕심일까?
1939년 2월8일 유주
벌써 삼일 째 일기가 맑고 온화해서인지 매일 열시 후에는 경보가 나서 들판으로 나아가곤 한다. 일기가 맑기만 하면 일본군의 비행기가 폭격하러 내려오는 것이 일과다. 하지만 제시는 야외로 나가기만 하면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한잠씩 늘어지게 자는 것이다. 포탄 속에 납작 엎드려 있는 사람들 속에서 새근새근 자는 것을 보니 참 속도 좋은 아이다. 우리 아기에게는 전쟁도 공습도 피해가나보다. 오늘도 역시 아기는 잘 자고 들어왔다.
저녁이 되어서는 제시의 앞이마와 귀밑까지 머리가 자라 덮었음으로 잠든 틈을 타서 깎고 다듬어줬다. 이것이 제시의 두 번째 이발이다. 제시 부모로서의 역할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마치 거울이 되는 것과 같다. 자식들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 부모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거울이 깨지면 그 속에 비춰진 모습도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이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에 대해 눈뜨게 된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고 미래를 그려본다. 이제 나는 한 아이의 거울이 되어 그 아이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또 깨닫게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1939년 4월5일 유주
아침의 날씨는 좀 추운듯하지만 푸른 하늘에 옅은 구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제시의 기분도 퍽 경쾌한 모양이다. 그래서 연하여 ‘에-’의 노랫가락과 ‘얼널널-’의 말솜씨가 자주 흘러나오고 있다. 일기가 맑은 만큼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제고 나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경보는 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를 평안히 지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1939년 4월6일 유주
일기는 아주 봄날이었다. 아침 열한시경에 경보가 울려서 전과 같이 교외로 피난을 갔었다. 마침 오늘은 한교 일행 사십여명이 중경을 향하여 떠나는 날이다. 이미 중국 정부 각 기관이 일찌감치 중경에 자리하고 있고 김구 선생님과 우리 원로 국무위원들도 중경에 자리를 잡고 계시다. 제1, 제2의 두 차례 버스가 일행을 싣고 떠나감으로 쓸쓸하기가 짝이 없는데 그 느낌을 어린 제시도 느끼는 듯했다.
1939년 4월8일 유주
일기는 명랑치는 못하고 바람이 좀 불어서 늦은 봄날 같다. 아침 열시에 경보가 나서 피난을 갔다 들어왔는데 곤히 자고 있는 제시를 들쳐 안고 나갔다 들어와서 그런지 공연한 억지를 쓰고 있다. 오늘은 웬셈인지 제2차 경보가 2시반에 났다가 한 시간 만에 해제되고 다시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오후 네시 경에 3차 경보가 또 났다. 세 번이나 피난을 갔다 온 셈이다. 그때마다 야외로 피난을 가서는 창가 연습도 하고 이야기도 했는데 제시는 창가를 할 때면 같이 ‘이, 이, 이-’하는 소리를 높고 또 낮게, 또 깊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저녁에는 하루 종일 피난 다니느라 더럽혀진 몸을 대강 씻어줬더니 아홉시나 되어서야 노곤히 꿈나라로 여행을 가고 말았다.
1939년 4월19일 수요일 유주
오늘도 장마비는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제시는 아침부터 비 내리는 것을 구경하자며 문밖으로 나가자고 야단이다. 떼를 쓰기 시작하면 좀처럼 그치지를 않는다. 그쳤다 내렸다하는 요즘의 비처럼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앞의 정황이다.
생후 255일 맞은 제시가 아버지 양우조 선생이 사 준 첫 장난감인 태극선 모양의 딸랑이를 들고 있다.
■다시 떠나는 피난길
1939년 4월22일 토요일 의산현
유주에서의 생활은 오늘로 안녕! 5개월이나 우리 아가를 키워주었던 지방이다. 생전 처음으로 인류의 잔악상을 체험했던 유주. 일본인의 악독한 행동은 잊을 수가 없다. 공습경보가 나가 피난 가던 장소들… 더운 지방이라 대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이것도 안전치 못하다하여 평지 공동묘지로 가서 비행기가 오면 무덤 옆에 드러누워 비행기의 행방을 지키던 일들, 유주에서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교통편은 중경에 가 있는 김구 선생님이 중경의 중국 교통부와 중앙당부와 교섭하여 보내신 버스였다. 오전 10시쯤, 정거장으로 가서 모든 행리를 버스 안으로 옮겨 실었다. 오후 1시 반에서야 고동소리를 두어 번 내며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거의 이천오백리(십리가 사 킬로이나 천 킬로인 셈이다)나 되는 험악한 산토의 원행을 시작하는 첫 걸음을 떼었다.
광서성의 깎아 세운 듯한 기묘하고 험악한 산세가 핑핑 돌아가는데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길이 만들어진 대로 깊고 높은 산길을 달리고 있는 버스 안에서 우리 일행은 상쾌한 기분과 동시에 위험을 느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작은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산과 산 사이에 간신히 달려 있는 듯한 논밭에는 어느덧 보리가 다 익어서 거둬졌고 밑이 누렇게 익어있었다. 이런 경치를 처음 보는 제시도 몹시 유쾌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안고 들추어 주는 것을 무상의 만족으로 여기던 제시는 흔들흔들 춤을 추는 자동차 안에서 좋다고 외마디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1939년 4월24일 월요일 귀주성 독산
오늘의 행정은 40여리나 되는 먼 길이기에 이른 아침 떠난 차는 가장 높은 속력으로 기운차게 달음질친다. 버스여행이 계속되면서 우리는 이 생활에 저마다 적응해 가고 있다. 도중에 시내에 들를 때마다 빨래를 하고 다시 차로 돌아오면 버스 안에 노끈을 매어놓고는 빨래를 널어놓았다. 귀주땅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광서땅의 길보다는 좀 좋은 듯 했지만 굴곡은 더 심하였다. 대부분 벼랑을 휘돌며 길이 만들어진 만큼 낭떠러지에 부서져버린 차 흔적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찬해들을 보는 순간 그 속에 제시와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길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아슬아슬한 감이 없지 않았고 이 여행이 큰 모험이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제시는 이 괴롭고 위험한 여행 중에서도 잘 자라고 있다. 어느 날인지 몰라도 어느새 윗니 두개가 나온 것을 찾게 됐다. 고생스러운 여행 중이었는데도 기특하다.
1939년 4월26일 수요일 귀양
차가 험악한 산길에 장시간을 줄걸음 쳤기에 무리를 했는지 다소 수리가 요구된다고 한다. 덕분에 이삼일은 평안히 쉬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여행길이 산길이라서 도중에 식사를 사서 해결할 수도 없고 해먹기는 더욱 번거로워서 산 속에서 만나는 원주민 묘족에게 식사를 부탁해서 먹었었다.
태산준령을 그 몇 번이나 넘어오기에 일행들의 얼굴은 그을리고 검게 되었지만 제시 아가의 얼굴은 여전히 백옥 같아서 안고 시가에 나가면 마치 까마귀 무리 중에 지나가는 해오라기 같아서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더 보며 가는 것이다.
1939년 4월28일 금요일 등재
오늘 아침에야 차 수리가 다 되었으므로 운전수만 바꿔 떠났다. 귀양에서부터는 산길이 전날보다 더 험악했다. 여기저기서 자동차가 쓰러져 넘어진 것을 종종 보게 된다.
1939년 4월29일 토요일 동계
아침 일찍이 행차하여 전날보다 더욱 험한 산길을 오게 되었다. 루산관이라는 높고 험한 령을 조마조마한 가운데서 거의 다 지나가다 올라오는 차를 피하려 갑자기 움직인 버스는 내리는 비에 젖은 길이라 미끄러지며 차가 산 쪽 도랑에 빠지면서 산 바위에 부딪혀 넘어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깨어져 내려오는 유리창 소리와 차체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위로 올라가고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그 바람에 곤히 잠자고 있던 제시가 외마디 울음소리를 터뜨리며 깨어났다.
정신이 아득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무사하였다. 놀랐을 뿐 상처 입은 사람은 없었다. 즉시 일꾼들 육칠십명을 불러다가 끌어내어 바로 세우는데 네 시간이나 걸렸고 부리던 짐을 다시 차에 옮겨 싣고 간신히 동계라는 곳까지 와서 투숙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가슴이 뛰는 사고를 겪은 우리에게 남은 여정은 백여리나 된다. 무던히 피곤하다.
양우조와 최선화가 번갈아가며 쓴 제시의 육아일기 원본 사진
제시 ‘아부지’ 양우조의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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