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CMA 한국현대작가전을 준비한다 아티스트 - (5) 김범
웃음을 통해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질문 던져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으로 죽음과 공포 다뤄
망치가 임신했다.
열쇠는 산이다.
통닭이 기도한다.
김범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던져주는 것, 끌어내고 싶은 것은 상상력의 힘이다. 그는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와 같은 이미지의 배반이 짓궂고 기발하며 발칙하고 유쾌하다. 일상의 평범한 물체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과 고정관념을 기만하는 장난이다.
‘현관열쇠’
‘임신한 망치’
‘접는 칼’
김범은 97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드넓은 전시장에 달랑 망치 오브제 하나를 갖다 놓았다. 손잡이 부분이 볼록한 이 작품의 제목은 ‘임신한 망치’, 사람들은 그 자유롭고 재미있는 물활론(animism)적 상상에 킬킬거렸고 이후 김범은 ‘임신한 망치’의 작가로 불리곤 했다.
‘기도하는 통닭’ 역시 사물에 대한 장난스런 해학을 보여준 작품이다. 통닭은 언제나 가로로 뉘어진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돼있는데 이를 세로로 놓자 그 실루엣은 무릎 꿇고 두손 모아 기도하는 형태가 된다. 웃음과 함께 도발적인 상상력과 경쾌한 순발력, 천연덕스런 재치에 손뼉을 치게 되는 작품이다.
열쇠의 선을 확대해 그린 열쇠 연작의 경우도 그 실루엣은 지극히 단조롭지만 메시지는 진지하고 냉소적이다. 산등성이 능선인 줄 알았던 이미지가 열쇠의 개폐 굴곡이란걸 알게 된 순간 우리는 속았다는 느낌보다는 고정관념의 숲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예술에서 가장 매혹적인 요소는 이미지의 진실과 착오다”라고 김선정 한국 큐레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김범은 실재와 착오, 진실과 조작, 사물과 이미지, 변장 혹은 위장을 통해 시각적 인식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물의 모습을 이끌어 내거나 찾아보라고 요구한다.
그의 작업은 좀 예민하긴 하지만 다행히 너무 심각하지 않고 유머와 해학이 넘쳐나서 부담스럽지 않다고 비평가들은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가까이 접할 수 있는 물체를 소재로 해학이 가득한 오브제와 영상, 드로잉의 다양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자신만의 도발적인 창의성과 자유롭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마음껏 발산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됐고 이번 전시회에도 소개되는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An Iron in the form of a Radio, A Kettle in the form of an Iron, And a Radio in the form of a Kettle 2002)는 형태와 기능을 바꾼 실제 크기의 오브제 작품이다. 우리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물에 대한 기대를 배신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머릿속에 새겨진 형태와 모양, 이미지라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되고 사물에 대한 기존의 인식과 질서를 한번쯤 흔들어보게 된다.
역시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무제(뉴스)’(Untitled ‘News’ 2002)는 한 앵커의 뉴스 보도를 여러날 녹음한 다음 그가 말한 단어들을 모두 토막 내고 짜깁기해 작가가 새롭게 재생한 뉴스다. 뉴스에서 사용된 이미지와 언어를 조작해 작가 자신이 뉴스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방송하도록 만든 이 작품은 매스 미디어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보여준다. 진실과 조작(편집)의 혼동, 매일 이 세상의 정보를 독점적으로 전달하는 미디어와 그 정보를 비판없이 수용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 뉴스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나에게 중요한 뉴스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업이다.
김범의 작업에는 이처럼 해학적인 것이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쇠가시가 솟은 철조망으로 만든 ‘전기 올가미’(1992), 손잡이가 인간의 골 형태인 ‘접는 칼’(1996), 들여다보는 사람의 안구를 수집하도록 만든 장치라는 ‘안구수집기’(1993) 등 섬뜩한 소재의 블랙코미디 같은 작품들도 적지 않다. 살인과 죽음, 고문과 고통의 잔인성에 대한 관심을 우스꽝스럽고 신랄하게 표현함으로써 웃음과 공포를 함께 조성하고 경쾌한 긴장을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그의 작업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소재가 친근하고, 표현방법이 어렵지 않으며, 첫 대면에서 웃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농담’은 우리를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김범의 예술이며 목적이다.
‘무제(뉴스)’
‘라디오 모양의 다리미, 다리미 모양의 주전자, 주전자 모양의 라디오’
91년 뉴욕 비주얼 아츠스쿨 졸업
베니스·광주 비엔날레 등 참가
▲김범 작가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 뉴욕 비주얼 아츠 스쿨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뉴욕에서 5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북경, 런던, 베를린, 샌프란시스코, 도쿄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주요 그룹전과 베니스 비엔날레, 이스탄불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타이페이 비엔날레에 참가했다. 석남미술상, 에르메스 미술상,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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