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고흥주(미국명 해럴드) 예일대 법대학장은 인권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법학자이다. 현재 차관보급인 법무부 법률고문 인준을 위한 상원청문회를 갖고 있는 고 학장은 법률적 입장 때문에 공화당, 특히 극우진영으로부터 공격과 견제를 받아 왔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고 학장에 대한 공화당의 이런 앨러지 반응을 오바마 임기 중 그가 대법관에 지명되는 일을 미리부터 차단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 학장이 부시 행정부에 대해 가차 없이 가해온 비판들을 살펴보면 극우진영이 왜 그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분노하는지 그 배경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고 학장은 부시의 전횡에 대해 거침없이 쓴 소리를 쏟아왔다. 특히 그의 비판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부시행정부의 행위를 법리적 관점에서 냉정히 분석한 후 나온 것들이어서 극우에게는 더욱 뼈저릴 수밖에 없다.
특히 부시행정부의 고문과 관련해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리고 있다. “만약 대통령에게 고문을 자행할 최고통수권자의 권한이 있다면 그에게는 인종청소를 감행하고 노예제도를 부활시키며 인종차별을 격려하고 즉결처형을 허용할 권한이 있는 것과 같다.” 그 대상이 누구든 고문이 허용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잔인한 다른 모든 행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입장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부시행정부의 고문합리화에 법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 역시 한국인인 존 유 교수이다. 이런 논지의 바탕에 “많은 이들을 보호해 줄 소중한 정보를 얻을 수만 있다면 테러용의자 몇 명쯤 고문해도 문제될 게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정보공개법에 따라 CIA의 테러용의자 고문허용 메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진실규명을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을 제외하고 고문 자체에 대해서는 비난 일색이지만, 논란은 어떤 방식으로 진상을 규명할지와 관련자들을 처벌하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경제문제에 올인 해야 하는 오바마는 고문 논쟁이 부담스러운 듯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분위기로서는 독립위원회의 조사가 유력해 보인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순리다. 과거의 진실을 철저히 규명하지 않은 채 어정쩡하게 봉합하면 언젠가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 사실이 드러나자 고문을 통해 얻은 정보의 효용성도 언급돼야 한다는 보수진영의 볼멘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정보가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테러범 심문에 참여했던 미국 관계자들도 이 점을 시인하고 있다.
또 3일 CBS방송의 ‘60분’에서도 언급됐듯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한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온 포로들은 미국에 더 적대적이 되고 있다. 부시행정부의 주장처럼 그들의 정책으로 세상은 더 안전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험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관련해 지난 1999년 이스라엘 최고법원이 ‘국민들의 안전과 관련한 긴박한 위기’와 ‘죄수의 권리’ 사이에서 내린 유명한 판결은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운명이다. 모든 수단이 다 용인되지는 않으며 적들이 구사하는 모든 전략을 그대로 따를 수도 없다. 비록 민주주의는 등 뒤로 한손을 묶어놓고 싸워야 할 때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불리한 것만은 아니다. 법의 지배를 보존하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민주주의는 강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의 유혹은 소수의 권리를 유보함으로써 다수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로 표현되곤 한다. 하지만 편의와 실용이라는 명분으로 소수의 권리쯤은 유보될 수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용인되다 보면 그것은 사과 상자 속의 한 알의 썩은 사과처럼 점차 옆으로 번져나가 전체를 썩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고문 옹호론자들의 “테러범쯤이야”하는 생각이 불안한 사회분위기와 만나게 되면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극좌의 나쁜 행태와 맞닿게 된다. 이것이 전체주의의 얼굴이다. 전체주의에는 오른쪽과 왼쪽이 따로 없다.
등 뒤로 한손을 묶어 놓고 싸워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판결문이 특히 인상적이다. 무릇 민주주의가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이처럼 가끔은 불편할 정도로 지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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