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CMA 한국현대작가전을 준비한다 : 아티스트 - 전준호
전준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8년 초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렸던 개인전 ‘하이퍼 리얼리즘’(Hyper Realism)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다. 영상,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이 전시에 대해 여러 미디어들이 몇가지 시각으로 보도했는데 그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렇다. 표제작 ‘하이퍼 리얼리즘’은 600평에 달하는 거대한 공간을 5개의 채널로 구성한 대형 영상작품이다. 각 채널에는 탈북자들, 자유의 여신상, 맥아더 장군, 김일성 상, 북한지폐 등 5개의 매개체가 연속적으로 투사된다. 탈북자들은 끊임없이 담을 넘으려는 행위를 반복하지만 끝내 넘지 못하고, 퇴각하는 맥아더 장군은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를 계속 외치면서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피곤에 지친 북한 주민은 초가집(북한지폐 100원권 속의 김일성 생가)으로 들어가면서 “다녀왔습니다”를 반복한다. 분단 이후 남한, 북한, 미국의 세 국가가 처한 정치적 사회적 역학관계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한 이 작품은 심각한 메시지를 심플하면서도 풍자적인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다. 영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은 되풀이되는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전쟁은 반복되고, 탈북자는 어디선가 목숨 걸고 담을 넘고, 젊어서 이념에 목숨 걸었던 이들은 삶에 찌든 생활인이 돼 무너져 가는 이념을 목도한다. 극사실주의 작품보다 세상이 더 극사실적이다”
흑인 풋볼선수를 통해 미국사회를 풍자한 작품 ‘플레이어 13’.
20달러 지폐로 만든 영상물 ‘백악관’ 등 미국사회 풍자한 작품 전시
20달러 지폐를 애니메이션화 한 ‘백악관’. 백악관 창과 문을 흰색 페인트로 칠해서 지워가는 영상을 담은 작품이다.
이 전시에는 또 ‘플레이어 13’이라는 쇼케이스 안에 갇힌 흑인 풋볼선수의 동상이 설치돼있다. 조각상에는 ‘그의 열정적 심장은 영원히 기억되리라’는 거창한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가슴팍엔 싸구려 엔진이 박혀 있고 등에는 작은 배기통이 달려있어 매캐한 연기를 계속 뿜어낸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스타 플레이어지만 그의 삶과 실존은 이처럼 고달플 것이라는 작품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혹은 땅 따먹기와 비슷한 풋볼에 열광하고 엄청난 석유를 소비하는 미국인의 삶, 체스 판의 말과 같은 흑인선수의 모습이 압축된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다양하게 읽히는 작품이다.
이번 라크마 전에서 전준호는 그의 대표작 ‘백악관’(White House)을 보여준다. 이것은 20달러짜리 미국지폐 뒷면을 그린 정교한 디지털 애니메이션 작업이다. 얼핏 보면 그냥 돈을 확대해 놓은 것 같지만 잠시 후 한 사람이 그림 속에 등장해 페인트 롤러로 천천히 백악관의 모든 창문과 문들을 지워버린다. 32분16초 동안 계속되는 이 행위는 백악관과 달러로 상징되는 미국의 패권을 지루하고 무기력한 방법으로나마 지워보려는 소극적인 저항이다. 통쾌한 상상력으로 미국을 비판한 ‘화이트 하우스’는 한국을 넘어 외국에서도 큰 공감을 얻었고 전준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또 행운의 돈이라 불리는 2달러 지폐 뒷면의 1776년 미국독립선언서 작성 장면 속으로 들어가서 대한민국의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작업(‘In God We Trust’)도 보여준 바 있다. 아울러 한국 지폐를 소재로 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작업도 계속해왔는데 ‘부유하다’란 제목의 작품은 1만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경회루, 5,000원권 뒷면의 오죽헌, 1,000원권 뒷면의 도산서원에 작가가 들어가 돌아다니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마치 여유로운 산책처럼 보이는 이 행위에서 그는 텅 빈 도산서원, 오죽헌 빈 집에 들어가 ‘계십니까’를 외치지만 아무도 없고, 그저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는 무기력함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부유하다’란 제목은 ‘부자’라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지만,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한 개인이 무기력하게 떠돌아다니는 ‘부유’의 뜻일 수도 있다. 전준호의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처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내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해보자는 적극적인 비판이라보다는,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허무주의적 몸짓에 더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전준호는 미국적인 아이콘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반미’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라크마의 캐롤 엘리엘 큐레이터 역시 그를 확실한 반미주의 작가로 구분했다. 28일 카파 미술재단이 마련한 라크마 한국현대작가전 강의에서 그녀는 “전준호는 이번 전시의 12작가 중 유일하게 서울 출신이 아닌 부산 출신의 작가이며, 가장 정치적이고 한국의 분단 상황에 예민한 작가”라고 말하고 “백악관의 창문을 모두 없애고 벙커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는 반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반미가 아니라, 달라질 것이 없는 삶의 공허함 무의미함 소용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김선정 한국 큐레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작품은 완성된 픽션과 같다. 나는 소설을 쓰듯이 픽션을 창조하고 그 안에서 음향 사운드는 픽션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의 작품에서 오디오는 매우 중요하므로 거기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전준호는 92년 동의대 미대를 나와 영국 첼시 미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했고, 미국 버몬트 스튜디오 펠로십 과정을 마쳤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광주은행상’을 수상했고 2007년 슬로베니아 루블라냐비엔날레에서 ‘르블라냐비엔날레 대상’을 수상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런던, 베이징, 파리, 뉴욕, 독일 슈투트가르트, 칠레 산티아고 현대미술관, 일본 모리미술관 등지에서 많은 개인전을 가졌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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