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9월 가주 프레스노 주민들에게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가 만든 크레딧 카드 6만 장이 느닷없이 배달됐다. 이것이 미국 크레딧 카드 역사의 시작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백화점이나 주유소 등 특정 업소에서만 쓸 수 있는 크레딧 카드는 있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모든 업종에 걸쳐 쓸 수 있는 일반 크레딧 카드가 보편화된 것은 이 은행의 공이다.
1904년 이 은행의 전신인 ‘뱅크 오브 이탈리’를 세운 A P 쟈니니는 ‘작은 사람들을 위한 금융’ 신봉자였다. 다른 은행들이 대기업 대출을 제일로 치고 소시민 융자는 우습게 보던 시절 그는 이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데 앞장섰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나자 다른 은행들이 6개월간 대출 중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부둣가에 널판자로 책상을 만들고 돈이 필요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대출해줬다. 그의 혜안에 힘입어 BOA는 1921년에는 미국 최대, 1945년에는 세계 최대 은행으로 발전했다.
당시 은행업에는 심한 제약이 있었다. 타주 영업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뉴욕 같은 곳에서는 타 도시에서 비즈니스 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을 키워가기 위해 BOA 경영진이 착안한 것이 일반 크레딧 카드였다. 소시민들이 적은 액수의 론을 얻기 위해 일일이 은행을 찾을 필요도 없고 다른 점포를 방문할 때마다 다른 카드를 사용해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면 이용자가 급증할 것이며 이와 함께 은행 이익도 늘 것이란 계산이었다.
프레스노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카드 사용의 편리함에 눈을 떴으며 이를 받는 점포와 은행 수익도 늘었다. 이에 고무돼 BOA는 카드 살포를 가주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난이었다. 프레스노와 달리 LA 같은 대도시에서는 카드를 쓰고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이 쏟아졌다. 카드를 이용한 사기 사건이 활개를 쳐도 은행이나 사법 당국이나 신종 범죄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결국 카드 프로그램 책임자는 쫓겨났고 은행은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고객의 신용도를 체크해 카드를 발부하는 방법이 고안되고 크레딧 카드 사기전담반이 구성되면서 크레딧 카드는 점차 ‘집안 망나니’에서 ‘효자’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크레딧 카드 수익은 BOA를 최고 은행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비자의 모체가 바로 BOA가 시작한 뱅크아메리카드다. BOA가 날로 번창하는 것을 본 가주의 경쟁 은행들은 한데 힘을 합쳐 매스터차지란 카드를 만든다. 이것이 매스터카드의 전신이다.
60년대 들어 크레딧 카드 사용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은행 간의 카드 살포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진다. 그 결과 BOA가 가주에서 겪었던 문제가 전국적으로 벌어지며 마침내 연방 의회는 1970년 사용자 동의 없는 카드 발급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를 주도한 연방 하원 은행위원장인 라이트 팻먼은 “환전상들은 신전에서 쫓겨난 이래 이들은 상인과 고객 양쪽으로부터 돈을 뜯어내려 해왔는데 크레딧 카드가 이를 가능하게 해줬다”고 말했으며 존슨 대통령 소비자 문제 보좌관인 베티 퍼니스는 “미 국민들을 빚에 중독 시키려는 현대판 함정”이라고 이를 비난했다. 크레딧 카드의 문제점에 대한 우려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주 주요 은행 관계자들을 소환, 은행이 과도한 벌금을 부과하고 이자율을 마음대로 올리던 시대는 끝났다며 규제법안 마련을 시사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일반 서민들의 급전 융통 수단으로 크레딧 카드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는 반면 카드 발급 은행들은 모기지 융자로 잃은 손실을 카드로 만회하겠다는 듯 하루만 늦어도 과다한 벌금에다 높은 이자를 물리고 있다.
카드 회사들이 정작 좋아하는 사람은 매달 꼬박꼬박 돈을 다 갚는 우수 신용 고객이 아니라 납기일을 지키지 못해 숱한 벌금과 높은 이자를 감수하면서 매달 미니멈 페이먼트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은행도 나쁘지만 스스로 이런 함정에 빠져드는 소비자도 문제다. 절약하는 습관을 들여 더 이상 ‘카드회사의 봉’이 되지 말자.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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