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15일 광동성 광주
뉘여 안고 다니던 제시를 오늘부터는 바로 안아주기 시작했다. 팔 안에 들어온 제시는 목 힘이
든든하고 제법 큰애처럼 목을 좌우로 돌리며 놀았다. 아기도 사람의 표정에 섬세하게 반응한다.
어른이 된 우리의 마음도 사실은 이렇게 민감한데 그것을 숨기고 사는 게 아닌가? 세상을 살면서 감정에 무뎌지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되지만 결국 누군가에게 안 좋은 태도를 가지고 말하면 무뎌진 마음 사이로 자신도 모르는 상처가 쌓일 것이다.
아기의 마음을 갖고 사는 사람을 순수한 사람이라고, 마치 특별한 사람처럼 말하곤 하지만 사실은 아기 때의 반응이 인간 본연의 느낌이요, 반응일 것이다. 아기 때의 모습을 감추고 감추어 더욱 높고 두꺼운 담을 쌓는 것이다. 아기들의 그 즉각적인 반응에서 사람들 얼굴 속에 숨겨진 모습을 찾게 된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표정에는 웃음으로 피어나는 밝음이, 화나는 거센 표정에는 아기들처럼 그렇게 울고 싶은 서러움이 마음속에 떠오른다.
1938년 9월19일 광동성 불산
오후 2시30분에 우리 일행은 불산진으로 향했다. 불산은 광주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믿었던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연신 대패하며 뒤로 밀렸고 임시 정부는 다시 피난을 결정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가족을 비롯한 임정 식구 사십 여명은 오후 4시30분에 불산에 상륙했다.
제시를 안은 우리 가족은 미리 준비됐던 ‘복경방 28호’를 찾아들어갔다. 우리에게 있어 이런 집을 얻는 것 자체가 행운이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그나마 타국에서였지만 누려 왔던 정상적인 삶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우선 전쟁 통으로 인해 일자리가 없어졌다. 그것은 가족의 수입이 없어짐을 뜻했다. 먹을 것, 입을 것, 머무를 곳을 제쳐두고 늘 짐을 쌀 준비를 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중국인들도 이제 ‘일본’이라는 우리와 동일한 적을 두게 되어 재정적인 면 뿐 아니라 항일활동에 있어서도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한층 편해졌다. 이젠 눈치를 덜 보게 됐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비록 전쟁이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오늘의 중일전쟁은 우리 한교(한국교포)들에게 있어 희망의 전쟁이다. 덩치 큰 중국이 일본을 무릎 꿇게 만들 날이 곧 올 것이다.
1938년 10월3일 광동성 불산
제시는 이제 손으로 잡아당겨 볼 만 한 거리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끌어다가 들춰보기 시작한다. 지금도 배를 덮어준 기저귀를 끌어다가 입으로 빨아보기를 수차례하고 있다. 불산에 와서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있다. 아기가 먹을 양식이 부족하지 않아 좋고 일기도 좋다. 그래서인지 제시도 기분이 좋아 맹렬하게 운동을 한다. 자기 몸을 가지고 온갖 시험을 다 해보고 있다. 세상 속에 들어온 걸 깨달은 건지 한 세상 함께 지니고 살아야 할 자신의 도구들을 점검해보고 있다. 제시에겐 이곳이 고향이 아닌 낯선 중국이란 사실이, 평생을 믿고 살아야 할 나라를 빼앗겼는지가 하나도 중요치 않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 더욱 중요한 눈앞의 문제인 것이다.
1938년 10월11일 광동성 불산
제시의 백일 날이다. 엊그제 가슴에 안긴 제시의 얼굴을 처음 본 것 같은데 그 때에 비해 제시는 자기만의 몸짓으로 세상과 자신의 몸을 여유 있게 만나고 있다. 철없는 제시지만 백일 맞이라 해서 그런지 경쾌한 태도로 아주 기분 좋게 잘 놀고 있다. 그런 제시의 기분과 달리 바깥 분위기는 스산하다. 매일 아침마다 포탄소리가 천지를 뒤흔들고 있다. 적이 가까이 다가온 모양이었다. 오후엔 일본군이 광동, 담수 등의 지방에 상륙하여 물밀듯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불산 거리에는 짐을 옮기는 황황한 모습이 보이고 있다.
1938년 10월12일 광동성 불산
드디어 걱정하던 소식이 전해져왔다. 일주일 이내에 광주시와 부근에 일본군의 침입이 있을 거라는 소식이다. 위험을 느낀 중국 정부 기관과 함께 우리 기관(광주시에 있는 임시 정부)도 피난을 준비했다. 배는 간신히 준비가 됐으나 불산현에 있는 우리 교포들의 피난이 문제가 됐다. 그들의 처후 문제로 걱정하다가 간신히 해결이 되어 20일 떠나기로 결정됐다.
1938년 10월20일 삼수
10월19일 새벽 3시반. 사오일간 쌌다 풀었다하던 행리(짐)를 챙겨가지고 불산 정거장으로 나갔다. 우선 삼수까지 가기로 작정했다. 삼수로 가는 기차는 매일 매 시간에 한 번씩 있지만 만 여명의 피난민이 집중되어 들끓는 만큼 승차가 쉽지 않았다. 피난을 포기해야 하는 건지 눈앞이 깜깜했다. 다행히 장개석 위원장 덕분에 역장이 전차 하나를 준비해주었다. 아주 특별한 대우였다. 사십 여명 우리 일행은 모든 행리를 싣고 차로 떠나게 되었다. 때는 아침 4시30분이었다. 아침 열시쯤 삼수역에 도착하려 할 때였다. 갑작스런 공습경보에 차가 멈췄다. 순식간에 우리 일행 모두
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제시를 안고 정거장 서남쪽에 있는 높다란 탑 밑으로 피난했다. 이제 제시를 안고 뛰는 것에 익숙해진 터였다. 삼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오후 7시에 고요현을 향해 떠나게 됐다.
1938년 10월23일 고요현
오후 9시에 고요에 편히 도착했다. 도착한 후에 우리 일행은 광주에서 이틀 전에 도착한 교포 일행과 같이 움직이기로 했다. 내일 오후엔 광서 계평현을 향해 더 큰 목선 ‘익리선’에 승선할 것이다.
1938년 10월26일 오주
매일 공습을 당하면서 이틀만인 오늘 26일 오주에 도착했다. 피난길이긴 하지만 도중에 여러 곳을 지나며 광서성의 서강 여행을 경황없는 가운데에서도 흥미 있게 할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넓고 긴 서강은 폭도 넓었다가 좁았다가 강 굴기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면 다양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땅을 피난 다니며 그간 이름만 듣던 비경들을 보게 된다. 고단한 피난여행중이지만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느낌이다.
1938년 10월28일
오후 9시30분에 광서성 계평현에 도착하자 서신이 와 있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면 원선으로 유주까지 보내라는 내용의 전보였다. 그들은 광주 부근이 적에게 함락됐다며 상황이 급박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본래 타고 온 배의 기선은 벌써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우리가 타고 온 목선은 홀로 움직이지 못하고 별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주강은 거슬러 올라갈수록 물살이 세어지고 있어서 잘못하다가는 휩쓸려 갈 위험도 있다고 한다. 마두에 타고 온 목선을 대고 멈춰선 우리 일행의 초조하고 심란한 마음이 달빛 비치는 강의 아름다움마저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근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1938년 11월17일 계형편에서 북상 중
그동안 배를 계평현 북문외 부두에 대고 유주까지 끌어줄 기선을 구하기 위해 각 방면으로 뛰어다녔으나 여의치 못했다. 16일 오후가 되어서야 리행이란 작은 기선을 맞이하게 됐다. 어제 오후 4시30분에 부두를 등지고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배가 떠난 지 두 시간 남짓해서 백여 개나 되는 여울 중에 그 몇 번째인지 여울에 걸리고 말았다. 여울을 벗어나려다 실패하고 그만 그 저녁이 지나고 아침에야 겨우 벗어나 배를 끌어올리고 나니 어느덧 다음날인 17일 상오 11시경이었다. 힘든 항해였다. 배는 정박하고 밤을 지내고 있다.
1938년 10월11일 오전부터 들려온 포탄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며 화황한 가운데 백일을 맞은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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