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의사 버나드 맨드빌이 쓴 작은 책자인 ‘벌의 우화’는 부자들의 경제적 역할에 대해 도발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서민들의 귀에는 거슬릴 수도 있는 내용이겠지만 그가 내세우고자 한 주장의 핵심은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은 부자들이라는 것이었다.
맨드빌은 책 속에서 “나라에서 사치를 일거에 추방해 버린다면 포목상, 실내 장식업자, 재단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반년 안에 굶어 죽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예를 들기까지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당시 영국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 주었지만 경제학자들에게는 호응을 받았다.
얼마 뒤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도 사실 맨드빌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부자를 쓸데없는 물건이나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쫓느라 평생을 보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묘사하면서도 이런 말을 덧붙여 부자들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인정한다. “사회의 복지는 불필요한 자본을 축적하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욕망에 달려 있다.”
허영과 사치는 배격하고 회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쉽게 치부되지만 이것에 의해 경제가 활발히 돌아가는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측면을 지난 몇 개월간 지속되고 있는 경기침체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미국 경제의 근간은 소비다. 미국 경제는 70% 정도를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 소비가 원활히 이뤄져야 경제가 돌아가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경기침체가 시작되면서 여기에 심리적 우려가 더해지자 소비가 위축되고 이것이 경기를 더 침체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
이번 달 들어 주식시장이 호황을 보이며 “경제가 조금 나아지는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관측이 나오다가 “3월 소비가 약간 줄어들었다”는 보고서가 나오기가 무섭게 그날 주가가 크게 떨어진 것은 경제에서 소비 혹은 소비자의 심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그대로 보여준다.
연방정부의 경기부양책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젖은 낙엽처럼 도무지 불이 붙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비심리를 부채질해서 어떻게든 불씨를 살려보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대고 있는 것이다.
시사 주간지 타임이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이번 주 보도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들이 보여준 소비패턴도 절약과 신중한 지출이었다. 이런 특징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저축의 증가다. 그동안 버는 족족 쓰기 바빴던 미국인들이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저축에 신경을 쓰는 모습들이다.
저축은 개개인으로 볼 때는 아주 유용한, 그리고 권장해야 할 가계 관리방식이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다 저축에만 매달린다면 경기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미시경제로 볼 때는 아주 바람직한 태도와 습관이 거시경제에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축의 역설’이다.
부유층 소비도 그렇다. 이번 경제적 위기가 가진 자들의 탐욕에서 비롯됐다는 여론과 비난이 비등해지면서 부유층의 소비는 상당히 위축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소비 자제는 서민층처럼 저축을 위한 목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경제는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일찍이 이런 현상을 간파한 맨드빌은 그래서 부자들을 “허영심 많고 잔인하고 변덕스럽다”고 조롱하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보다 사회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책에 부제로 붙인 ‘사적인 악덕’ ‘공적인 유익’은 의도와 결과 간의 이런 역설적인 성격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세상의 작동 원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나쁜 동기가 꼭 나쁜 결과만을 초래하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도 마찬가지다.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며 의욕적으로 내놓은 정책이 오히려 부동산 시장을 들썩이게 만드는 것이 대표적이다.
오바마는 푹 꺼진 소비심리를 되살리려 국민들에게 희망의 언어를 던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신용카드 규제를 통해 자칫 과소비가 다시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은 막겠다고 밝히고 있다.
일견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바마의 이런 정책이 성공하려면 고도의 균형 감각이 뒷받침 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균형감 있는 정책은 의도와 결과 간의 역설을 잘 인식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노련하고 현명한 정치인이라면 꼭 지녀야 할 자질이다. 위기 속의 미국경제를 건져낼 해법은 이런 현명함을 요구하고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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