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분단은 민족의 비극을 낳아 이산가족이 1천만이 넘는다고 한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체제와 이념의 희생양이 돼 반세기가 넘도록 생사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금강산에 가족상봉을 위한 ‘면회소’가 완공돼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는가 했더니 갑작스레 남북관계가 급랭해지면서 또다시 이산가족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말았다. 국내 이산가족들의 암담한 처지와는 달리, 해외 이산가족들의 형편은 남북관계와 관계 없이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원하면 북쪽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절호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해외동포 이산가족들이 알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나는 벌써 6번째 북쪽 가족들에게 줄 선물 준비를 완료하고 내일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이곳을 떠난다. 평양행이 가까워질수록 국내외 다른 이산가족들은 두고온 북쪽의 가족들을 만날길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데 나만 가족상봉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 내마음을 무척 우울하게 한다.
1. 나의 최초 평양행
나는 조실부모에다, 형님 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고향생각과 북쪽의 친척들 특히 나를 가장 사랑하던 고모 생각이 간절해졌다. 군사정권 하에서는 가족상봉이라는 말 자체도 금기였기에 고향을 찾고 고모를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민을 결심하고 70년대 초, 미국 이민을 온 나는 자나깨나 북쪽에 살아계실 것으로 믿는 고모를 만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살다가 77년 여름, 나는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기내에서 나의 뇌리에는 별의별 생각이 떠올랐다. 불길한 생각도 없지는 않았으나 희망찬 생각이 더 강렬했다. 고모랑 삼촌들을 만나 기쁨에 넘쳐 얼싸안고 목놓아 우는 상상을 가장 많이 했다.
비엔나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북한 대사관으로 달렸다. 이윽고 비자를 발급받아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내 고향 강원도 ‘신고산’ 현지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대답을 당국으로 부터 들은 나는 거의 기절하고 말았다.
실망으로 가득찬 나는 입맛도 없어지고 더 이상 지체할 생각도 없어졌다. 봇짐을 싸들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북쪽 당국에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찾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나는 분단을 끝장내기 위한 통일사업을 말석에서나마 지지하고 지원하는 일을 합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순안비행장으로 향했다. 이것이 후일 나의 가족상봉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는 것을 알았다.
2. 첫번째 가족상봉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가족상봉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이게 왠일인가! 77년 가을, 가족을 찾았다는 연락이 북에서 왔다.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평양행을 감행했다. 호텔로 찾아온 사촌들은 30여년이 흘렀건만 나를 금세 알아봤고 나도 그들을 당장 알아봤다. 우리는 어쩔줄 몰랐다. 원산백화점 지배인으로 있으면서 나를 그렇게도 귀여워하던 고모는 미군 폭격에 그만 저세상으로 갔다는 이야길 먼저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도 미군 폭격이 심해 방공호에 완전히 들어간 자식들은 살아나고 좁은 방공호에 머리만 들여민 삼촌과 숙모는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의 참화는 우리 가족에겐 유별나게 처절하고 잔인한 비극을 안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형태이건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금 터득하게 됐다.
3. 최근의 상봉들
몇 년 전 은퇴를 하면서 매년 고향을 찾는게 내겐 최대의 보람이고 행복이다. 첫번째 고향방문에서는 사촌이 인민군 중령으로 정복을 입고 나타났다. 서울에는 나의 다른 사촌이 한국군 중령으로 있다. 나는 팔자가 좋아선지 기구한 운명인지 좌우지간 남과 북에 고급장교 사촌들이 있다. 형제가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도무지 마음이 편치가 않다. 어서 남북이 화목하게 평화롭게 살아야 된다는 신념이 점점 굳어져간다. 제발 어서 군복들이나 벗어던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는데 두 군인사촌들이 거의 같은 때에 제대를 해서 마음이 퍽 홀가분해졌다.
나에게 잦은 평양행을 부추기는 사람은 평양시내에 사는 나의 조카딸이다. 26살의 최영옥은 70평생 살면서 처음 보는 기특하고 효성이 지극한 애다. 매일 저녁이면 호텔로 찾아와 세탁물을 걷어가고 내복도 여분으로 사온다. 허리가 저리다면 허리를 안마하고 손톱까지 깍아주곤 한다. 어느새 나의 초상화를 자기 이웃 화가에게 부탁해서 그려온다. 때로는 이야기로 밤이 늦으면 호텔 옆방에서 자기도 한다. 떠나는 날에는 아침일찍 찾아와 모든 것을 챙겨준다. 순안공항으로 떠나는 차창에 매달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도무지 마음이 찡해서 어느새 나도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조카딸을 만나는게 이제는 나의 큰 희망이 됐다.
4. 나만의 가족상봉에서 남들을 위한 가족상봉으로
나는 이번 평양 방문에서 고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산 가족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를 모색해보련다. 혈육상봉에 무슨 애국과 비애국이 있을 수 있으며 사상과 이념이 결코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칼로도 벨 수 없고 톱으로 자를 수도 없는 것이 혈육의 정이거늘 어이 이를 미루거나 포기한단 말인가?
가족상봉을 주선하는 유관부서를 찾아서 자세한 이야기를 청취하고 상봉 신청에서 부터 상봉에 이르는 전 과정을 알아보려 한다. 또 개선할 것을 건의도 해보려고 한다. 미국에 돌아오면 여러 이산가족들의 상봉 경험을 실례로 들면서 북쪽 가족상봉 유관부서에서 청취한 최근 현황을 재미동포들에게 보고할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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