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슨스 코너에 위치한 한 미 금융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는 가장 최근에 있었던 회사 점심회식을 마치고 나오며 스스로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95년, 26세에 갓 결혼 하여 남편과 함께 미국에 공부를 하러 온 나는 딱 2년의 공부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바뀌게 되어 본의 아니게 이곳에 이민 1세대로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 중부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라는 도시에 위치한 워싱턴 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처음 2년은 뉴저지 주에 위치한 LG 미 현지법인 회계부서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그 후로는 이곳 버지니아에 내려와 6여 년째 미 금융회사의 재무부서에 다니고 있다.
그간 경험한 한국회사와 미국회사의 ‘회식문화’엔 차이가 좀 있다. 한국회사의 회식은 주로 저녁에 푸짐하게 이루어지며 주로 고기 집에서 술을 곁들여 회식을 한 후 마치 잘 짜여진 회사의 업무를 수행하듯 2차로 모두 노래방으로 향하여 간단한 안주를 곁들여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맥주를 마신다.
이에 반해 미국회사의 회식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저녁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회사의 경비로 밥값을 지불하므로 미국친구들도 평소엔 잘 가보지 못한, 그러나 한번쯤은 가 보고 싶었던 그런 고급스런 식당을 회식장소로 정하여 점심시간에 주로 회식을 갖는다.
한국회사의 회식에선 술을 너무 많이 권하고 또 늦게까지 남아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회식문화가 싫어서라도 한국회사 다니기 싫다고 한 동료도 있었지만 난 그런 한국의 회식문화가 너무 좋다. 그런 회식문화가 그리워서 다시 한국회사로 돌아가고 싶기까지 하다.
업무의 특성상 하루 종일 숫자와 씨름하고 재무제표만 들여다보는 답답한 업무를 떠나 소소한 일상사를 얘기하고 갖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나누며 주변에서 일어났던 웃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를 안주 삼아 동료들과 술을 나누는 자리는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이에 반해 미국회사의 회식은 내겐 업무를 잠시 떠나 흔히 ESL 이라고 하는 영어수업을 하는 느낌이다. 미국의 문화를 얘기해야 하며 요즘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들을 조금은 미리 알아 두고 있어야 하며 요 근래 인기 있는 미 TV 프로그램도 미리 보고 왔어야 한국의 회식에서처럼 대화의 주체가 되어 즐겁게 떠들고 먹고 잠시 업무를 떠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소에도 퇴근 후 집에 오면 미 뉴스도 부지런히 보고 인기 있는 미국 TV 프로그램도 틈틈이 봐 두어야 하는 것을 늘 업무의 스트레스가 많다는 이유로 저녁을 먹고 나면 인터넷을 켜고 으레 한국뉴스와 한국 TV 프로그램을 열심히 즐기던 나는 최근 가진 회식에서 드디어 반성이 필요한 시간을 맞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그 많은 동료들을 다 지나쳐 부서장 격인 부사장이 바로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이 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을 수도 있었다. 평소에 가까이 일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참에 신선하고 재미있는 소재로 얘기 나누며 평소 일은 열심히 잘 하지만 조용하기 그지없는 한국인 직원의 이미지를 활달하고 상식이 많으며 이민 1세답지 않게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고 있는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평소에 이민 1세대로서 나 스스로를 ‘이 정도면 훌륭해’, ‘회사 다니느라 스트레스가 많으니 한국 TV 프로그램 좀 보면서 피로를 푸는 것도 나쁘진 않아’ 하면서 그 많은 시간을 버려왔던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2세들처럼 유창하고 완벽한 발음의 영어를 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액센트가 느껴지는 매끄럽지 못한 영어라도 좋았다. 재미있고 신선하고 끊이지 않는 대화의 소재거리가 나에게 준비되어 있었더라면 그 부드럽고 연한 안심 스테이크가 얹어진 샐러드에 코를 박고 끙끙 매며 길고 길게만 느껴졌던 2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말이다.
이민을 갓 온 어떤 분들은 한국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한국학생이 되도록이면 없는 학교를 찾고 한국 TV 프로그램을 전혀 보지 않는 생활을 하기도 한다고 들었다. 영어를 빨리 배우고 잘 할 욕심으로 말이다.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편하고 좋은 내 나라말을 그렇게까지 원천봉쇄하고 높은 벽을 쌓아 전혀 접할 수 없게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미국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할 운명이므로 지금부터는 조금씩 시간을 더 할애하여 이민 1세대로서의 평생 숙제인 영어의 끊임없는 향상, 또 한국 문화만큼 미 문화 또한 더 친숙해 질 수 있도록 평소 노력을 해야 함을 절실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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