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할아버지가 현이네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된 듯싶다. 현의 기억으론 다섯 살 생일 때 아버지가 손에 케이크를 들고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아버지의 머리 위로 검고 큰 얼굴을 보았을 때가 처음 할아버지와의 만남일 것이다. 호기심에 차서 현은 자기도 모르게 발끝을 들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머리를 끄덕이며 현에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후 1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크리스 할아버지는 현이네 가계나 집에 없어서는 안 될 식구가 되었다. 아무도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을 뿐더러 할아버지도 자기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늘 흰 러닝셔츠에 색 바랜 블루진이나 카키복을 입고 있었다.
70세는 됐을 성싶은 할아버지는 무거운 콜라 박스나 물통을 한손으로도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높은 선반 위에도 손이 닿아 사다리를 쓰지 않아도 됐다. 말이 전혀 없어 혹 할아버지가 벙어리거나 말을 더듬는 것일까 생각됐지만 창고 안에서 혼자 일할 때면 굵고 깊은 저음으로 남부의 블루 뮤직을 읊조렸다. 슬프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했다. 현은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할아버지가 아픈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일부러 모른척했다.
아버지는 물품을 떼러 뉴욕이나 워싱턴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공장으로 일하러 가시면 현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식품과 잡화상을 겸한 작은 가계를 지켰다. 할아버지는 돈 만지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다. 그래서 금전대를 열고 거스름돈을 손님에게 주는 일은 현의 몫이었다. 할아버지와 현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현은 할아버지를 위해 라면을 끌이면 그는 사양을 하고, 흰 빵에 콩버터를 발라서 손가락 소시지를 안에 싸서 잡수셨다. 더불어 마른 건포도를 좋아하셨다.
주말이라야 겨우 할아버지는 하루를 쉬셨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웬일인지 이틀째 가게에 나오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전화를 거셨다고만 하셨다. 현은 큰 소지지 통과 건포도 박스를 들고 할아버지 집을 찾아 나섰다. 주정부가 대여하는 아파트들은 낡고 우중충했다. 문을 두드렸다. 조용했다. 현은 문을 살짝 밀었다. 문이 안으로 활짝 열렸다. 창문을 통해 환한 빛이 현의 눈을 잠깐 어지럽혔다. 서서히 할아버지가 누운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아주 큰 눈을 뜨셨다. 그리고 예전처럼 눈을 껌뻑하셨다. 할아버지가 상체를 일으키실 때 흰 러닝셔츠에 군데군데 피가 번진 자국이 드러났다. 현은 재빨리 셔츠를 제쳤다. 칼이 스치고 간 자국들에서 피가 응고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꺼리는 눈치여서 갖고 간 물건을 드리고 “몸조리 잘 하셔요”라고 아픈 마음으로 아파트를 나섰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자 할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옛 모습대로 나타나셨고 변함없이 일을 하셨다. 현도 이일을 잊었다.
현과 할아버지는 친구에다, 형제처럼, 그리고 친할아버지처럼 가까워졌다. 할아버지는 큰 손으로 현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가 꾸중하시거나, 학교성적이 떨어지거나, 제대로 일이 안 될 때 할아버지는 큰 눈을 껌뻑거리며 “괜찮아, 힘 내 젊은이”라고 격려했다.
새해에 들어서 할아버지는 거동이 좀 느려졌다고 할까. 그래도 할아버지는 상품의 재고를 손에 적어놓은 것처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현이 말리는데도 할아버지는 자기 돈을 내고 캔디를 사서 드나드는 꼬마들에게 넌짓넌짓 주었다. 현은 아버지가 뭐라고 해도 할아버지가 쓸 캔디를 따로 마련해 놓아야했다.
부활절이라 캔디와 쿠키를 산다고 법석대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는 한 버킷의 달걀을 바닥에 놓고 퍼가게 했다. 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리셨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을 피하셨다. 현이 “할아버지, 웬 달걀이에요?” 묻자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저 달걀 속에서 새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지”라고 큰 눈을 껌뻑하셨다.
저녁이 되자 가게는 손님이 뜸해지고 아버지는 교회에 가신다고 서둘러 나가셨다. 현이 카운터에 등을 돌리고 부활절 예배가 녹화된 뉴스를 볼 때 갑자기 섬뜩 옆구리에 차가움을 느꼈다. 찬양 소리에 섞여 “움직이지 마, 죽여 버릴 테야”라고 귓전에 들렸다. 현이 얼굴을 돌릴 때 할아버지가 “여보게 안 돼”라고 소리치며 카운터로 달려왔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은 총부리를 그에게 돌리고 한방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할아버지의 큰 몸이 소리없이 쓰러졌다.
알링턴 국군묘지에 몇 명의 초병들이 도열해있고 현은 차곡차곡 접힌 성조기를 들고 서있었다. 몇 발의 조총소리가 들렸고 반짝이는 별을 단 장군이 은성무공훈장과 할아버지가 남긴 무엇인가를 현에게 건넸다. 장군은 “크리스 루이 상사는 월남전과 1차 이라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자랑스런 군인이지. 자네에게 모든 것을 남긴다고 했네. 특히 그가 월남전에서 총탄에 맞아 깨어진 십자가를 간직해달라고 유언에 남겼다네.” 현은 하늘을 바라봤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양민교
의사.리치몬드,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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