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 때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태복음16:14). 이 말은 자기들의 고백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하는 간접화법이었다.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기의 주관적인 신앙보다는 다른 사람의 피동적인 의견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 때 제자들의 맏형인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말이 끝나자 이렇게 고백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마태복음16:16)
사실 그 때의 베드로의 상태를 보아서 그런 신앙적 고백을 할 수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칭찬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에게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신 분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이 이해하셨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은혜라고 한다.
사실 교회의 근본은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핵심은 세 가지이다.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이것을 또 한 가지로 정리하면 주는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살아계시다는 것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이고, 설령 죽는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통방통한 기독교의 진리이다. 죽어도 사는 것, 살아 있어도 결코 죽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 믿음의 위대한 유산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에 의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에 삼일 만에 다시 사셨다. 이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것이 부활신앙(復活信仰)이다. 완전히 죽으셨다가 완전히 사셨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또한 죽지만 살게 된다.
부활의 전제는 죽음이다. 만일 죽지 않고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대속의 죽음이요, 희생의 죽음이다. 자신을 위해 죽은 죽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하는 사랑의 죽음이요, 모욕과 고통, 고난, 치욕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죽어야만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 길을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였다. 베드로가 그 고백을 할 때에는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앞으로 제자로서 살아갈 때에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고백이었다.
오늘 날 부활을 그냥 부화(孵化) 정도로 약화시킬 때가 있다. 암탉이 달걀을 품고 그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은 부화에 지나지 않는다. 부화는 죽는 것이 아니라 품는 것이다. 품는 것은 간직하는 것이고, 소유하는 것이고, 죽지 않고 목숨을 지키는 것이다. 썩어야 하는데 썩지 않고, 없어야 하는데 많은 것들을 취하고 있는 것이 부화이다. 부화는 죽는 것이 아니라 잠수하는 것이고, 피하는 것이고, 숨어있을 뿐이다. 위장과 변장이다.
성경에 세리와 바리새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세리는 당시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세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멀리서서 하나님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저는 한 주일에 두 번 금식기도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신앙은 단순한 환경변화나 자기 변장만은 아니다. 죽지 않고 죽은 척할 수 없고, 지금 목숨이 붙어있다고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정말 죽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장사꾼이 이익 없이 장사하는 것이라 말하고, 노인이 일찍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몸통은 숨기고 깃털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교회가 살려면 죽어야 한다. 부화가 아니라 부활되어야 한다. 나의 의는 죽고 예수님의 의가 살아야 한다. 나의 이성과 감정과 지성, 온 인격이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죽는 척 하면 하나님과 사람들이 알게 된다. 부화할 사람은 다시 죽지만 부활한 사람은 다시 살게 된다는 진리를 믿고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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